숨바꼭질은 끝났다. 국방부가 뜸들이고, 둘러대고, 심지어 거짓말로 연막을 치면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레이더와 발사대를 무사히 경북 성주 골프장에 들여놨으니 말이다. 경찰을 무려 8,000명이나 동원해 호위무사를 자처한 걸 보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불안했나 보다. 북한 김정은이 연거푸 미사일을 쏘아대는 터라 사드라는 방패가 필요하다는데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환경영향평가를 건너 뛰는 심각한 절차상 하자가 있더라도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랴.
그런데 어라?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술래를 바꿔서 게임을 다시 하자고 윽박지르니 기가 찰 노릇이다. 더구나 상대는 세계 최강의 독불장군 도널드 트럼프다. 사드 비용으로 당연한 듯 10억 달러 청구서를 내밀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우리 돈으로 1조1,400억원에 달한다. 한국군 병사 전체의 1년치 봉급과 맞먹는다. 미 본토에서 사용하던 중고 제품을 돌려 막은 탓일까. 사드 1개 포대에 족히 1조5,000억~2조원은 될 거라던 당초 예상보다는 저렴한 게 그나마 다행이다. 추가 판매를 염두에 두고 처음 선보이는 제품이라 가격을 후려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기껏해야 사드 배치 여부를 놓고 옥신각신하다가 갑자기 비용문제가 튀어나와 판을 뒤흔들면서 정부는 뒤치다꺼리나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10억 달러 발언에 청와대, 외교부, 국방부의 핵심 인사들조차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나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미 측과 주고 받은 다른 얘기가 있는 것이냐”며 진의 파악에 분주할 정도로 충격파는 컸다. 하지만 황 권한대행은 나 몰라라 뒷짐만 지고, 논란의 당사자인 김 실장은 입을 닫은 채 제 살길만 궁리하고 있다. 허세와 엄포로 초장부터 상대를 정신 없이 몰아치는 트럼프 대통령의 케케묵은 수법을 익히 알면서도, 전례 없는 외교참사에 직면한 정부는 미국의 기습공격에 휘청대며 한없이 궁지로 몰리는 모양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간신히 결혼 승낙을 받았다가 숨겨둔 자식이 있다는 폭탄 선언에 뒷목을 잡고 쓰러질 지경이다.
우리가 분노하는 건 10억 달러가 아니다. 그깟 무기야 가성비를 따져 제돈 주고 사오면 그만이다. 문제는 한미동맹이 가치관을 공유하는 혈맹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즈니스로 변질되면서 카운터펀치를 맞고 정부가 방향타를 잃었다는 점이다. 국방부는 한미간 합의에 따라 사드 비용부담은 미국의 몫이라고 되뇌지만,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까지 들먹이는 트럼프정부가 어떤 합의인들 온전히 놔둘까. 미국이 교활하다면 우리는 더 약삭빠르게 ‘플랜 B’를 마련해야 할 텐데, 정부가 오로지 국민을 기만하는데 여념이 없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대선 일정에 맞춰 구걸하듯 사드를 들여와 ‘알박기’에 나선 자체가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었다. 속을 꿰뚫은 미국은 사드 레이더를 오산기지에 숨겨놓고, 요격 미사일은 B-1B폭격기로 배달하며 제멋대로 행세했다. 부산항의 8부두를 출발해 심야에 몰래 옮기던 발사대가 고속도로에서 목격되지 않았더라면, 성주에 도착한 장비들이 대체 어디서 왔는지조차 미궁에 빠질 뻔했다. 그런데도 군의 내로라하는 고위 인사들은 “차기 정부에 부담이 돼서는 안 된다”며 사드 졸속 배치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제 닷새 후면 차기 정부가 닻을 올린다. 사드 배치를 재검토하자, 미국과의 합의는 존중하자, 아니면 아예 추가로 몇 개를 더 들여오자며 후보마다 해법은 중구난방이다. 분명한 건 정부가 탄핵 와중에 미국을 상대로 조바심을 내면서 더 이상 쓸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불똥이 방위비분담금을 비롯한 전체 안보비용으로 튄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다. 한반도를 지켜준다던 사드가 왜 비수가 돼서 우리 국민의 뒤통수를 겨누는지 누군가는 속 시원하게 답해야 하지 않을까.
김광수 정치부 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