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기존 동맹관계를 재평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외교 전반에서 정책과 가치를 분리해 상대국에 자유와 인권 등 미국의 가치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미국의 외교정책 방향은 북한이 핵ㆍ미사일 포기 등에 동의한다면 미국이 한반도에서 한국이 주도하는 통일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어 파장이 예상된다. 또한 인권을 가볍게 여기는 국가들이라도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관계 개선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도 읽혀 적잖은 반발이 따를 전망이다.
틸러슨 장관은 3일(현지시간) 국무부 청사에서 이뤄진 직원 및 외교관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미국 외교관은) 정책과 가치의 차이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며 “자유, 인간 존엄성, 사람들이 받는 대우는 우리의 가치일 뿐이며 (미국이 추진하는) 정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의 가치를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우리 국익의 주장 수준을 낮춰서는 안되며, 우리의 오랜 가치를 받아들이라고 다른 나라를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면 안보와 경제 이익에 장애물을 만든다”고 강조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국정기조는 대외 정책과 가치를 분리하는 것을 뜻한다”고 덧붙였다.
미국 외교수장의 발언은 트럼프 정권 이후 예견된 것이지만, 명분보다 실리를 앞세운 미국의 새로운 외교가 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에 큰 영향이 예상된다. 특히 인권탄압ㆍ독재정권 등을 이유로 미국이 따돌렸던 국가의 경우 대미관계에서 급속한 개선이 전망된다. 실제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필리핀 등은 이미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나서 관계 개선의 손을 내민 상태이다. 여론의 비난을 초래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과 영광스런 만남을 갖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틸러슨 장관은 “냉전종식 이후 20년간 국제사회에서 (국가간 이익의) 균형이 크게 훼손됐다”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의 방위비 분담 현실화 등 무너진 균형을 제자리로 되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해 기존 동맹관계에 대한 재평가 필요성을 강조했다.
동맹과 ‘미국적 가치의 실현’ 대신 철저한 국익을 외교정책의 목표로 삼은 만큼 북핵ㆍ미사일 이외의 주요한 국제사회 현안을 처리하는 방식도 전임 정권과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결국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구상한 ‘전략적 책임외교’ 구도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전략적 책임외교’란 중국이 북핵 문제 해결의 전면에 나서듯이 세계를 몇 개 세력권으로 나누고 영향력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미국이 지역 강국에 질서 유지를 위탁하는 전략이다. 외교안보연구소 신성원 경제통상연구부장은 “오바마 정권이 강조해온 인권과 같은 문제가 소홀히 다루어질 수 있으며, 작은 나라의 의견이 충분히 존중되지 않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워싱턴=조철환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