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푸른 하늘 아래 운동장에 모여 부르던 노래가 귓가에 쟁쟁하다. 하늘 높이 올라가던 맑은 목소리들. 붙잡을 수 없는 것들. 어린이날 버스를 타고 멀리 구덕운동장까지 간 적도 있다. 처음 보는 큰 운동장과 푸른 잔디. 색색의 애드벌룬과 사람들. 먼지와 함께 훅훅 끼쳐오던 더운 열기가 지금도 생생하다.
신록의 계절 5월이 돌아왔다. 이 어김없음, 계절과 날씨의 진행만큼 우리를 설레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아버지는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는 기후의 총합이라고 했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공진호 옮김, 문학동네) 2장에 나오는 대목이다. 죽음을 앞둔 아들 퀜틴의 머릿속에 재생되는 아버지의 말은 무(無)로 이끌리는 인간 존재의 한 측면을 강조하는 가운데 발화된 것이다. ‘흙과 욕망의 교착상태’로 인간을 정의하는 허무주의자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기후는 그 ‘흙과 욕망’의 우선하는 질료일 수 있다. 동의하든 않든, 다소 냉소적인 기후-인간론은 흥미롭다. 가볍기까지 하다. 하루하루 겪은 날씨를 모아보면 그게 인간이라고?
아버지의 말이 환기되기 직전, 퀜틴이 보고 있는 것은 초여름(2장의 제목은 ‘1910년 6월 2일’로 퀜틴이 화자다. 그는 이날 자살했으므로 우리는 죽은 자의 시점을 마주하고 있다.) 보스턴 교외 시골 냇가의 풍경이다. 그는 고향인 남부 제퍼슨의 여름을 떠올린다. “고향에서 팔월이 끝나갈 무렵이면 이런 날들이 있다. 이렇게 산소가 희박하고 열망으로 가득한 날들이, 서글프고 향수 어린 친숙한 무언가가 느껴지는 날들이.”
앞으로 돌아가면 전차에서 막 내려 낯선 고장의 대기를 접한 몸의 감각도 있다. “소리마저 이 공기 속에서는 잦아드는 듯했다. 아주 오랫동안 소리를 실어 나른 나머지 공기가 지쳐버린 듯했다. 개 짖는 소리는 기차 소리보다 멀리 실려간다. 어쨌든 밤에는 그렇다. 사람 소리도 그렇다.” 여동생 캐디에 대한 과도한 사랑과 욕망은 지금 스스로를 폭파시키기 직전이다. 그의 지나치게 섬세한 의식은 현재와 과거를 혼란스럽게 오가고, 이미 죽은 자의 시간에까지 이르러 있다. 이 카오스를 지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저 희박한 산소와 가득한 열망의 이야기, 소리를 실어 나르는 공기의 이야기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잘 알지는 못하는 대로 그 진실을 수긍하고 싶어진다. 그 순간 그는 거의 완벽하게 대기와 교섭하며 깨어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그는 정말 살아 있는 것이다. 대기와 함께 세상의 표면과 딱 붙어버려 상실될 수도 훼손될 수도 없는 기억. 누가 이런 시간, 기억의 총합을 인간이라고 이야기해준다면, 나는 고맙게 그의 인간론을 받아 안고 싶을 것 같다.
지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에릭 로메르 감독은 유독 날씨에 민감한 영화를 찍었다. 그는 “내 영화는 날씨의 노예”라며 기상학이야말로 자신의 영화를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 바 있다. 파스칼의 고향이기도 한 클레르몽페랑의 눈 오는 겨울 하루가 아니라면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은 그 유혹과 거절, 내기의 이야기가 될 수 없었을 테다. 이때 세상의 공기는 배경이나 리얼리티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 마음의 움직임과 함께 존재한다.
‘하하하’의 여름, ‘북촌방향’의 겨울이 생각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대기의 표면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작동시킨다. 영화를 보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그 표면이 사랑스러워지고, 그걸 너와 나의 조건으로 껴안게 될 때가 있다. 날씨는 결국 세상이 선사하는 우연이다. 눈앞의 저 꽃이 세상의 마지막 꽃이라는 걸 우리는 쉽게 망각한다. 오늘 5월의 햇살이 눈부시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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