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5.1
영국 산악인 조지 맬러리(George Mallory, 1886~1924)는 1923년 3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그게 거기 있으니까(Because it’s there)”라고 답했다. 실제로 그가 그렇게 말한 게 아니라 기자가 지어 쓴 글이라는 설이 있지만, 어쨌든 그 해 3월 18일자 기사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의 저 간명하고도 직관적인 대답은 이후 수많은 알피니스트들이 감당했을 질문, 혹은 자문(自問)에 대한 멋진 대답이었다. 이듬해 6월 그는 에베레스트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등정 성공의 대답도 만년설 에 묻혔다. 만일 그의 최초 등정 사실이 밝혀질 경우 에드먼드 힐러리 팀의 초등(1953) 기록서부터 알피니즘의 역사가 바뀌게 된다. 그는 그렇게 히말라야의 전설이 됐다.
잉글랜드 체셔 주의 한 부유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난 맬러리는 13살에 윈체스터 칼리지에서 수학 학위를 받을 만큼 공부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거기서 수학만 배운 게 아니었다. 그 대학 학장이 맹렬한 암벽 등반가였다. 그는 1905년 캠브리지 모들린 칼리지에 입학해 역사학을 전공했고, 메이너드 케인즈 등 훗날의 불룸즈베리 그룹 명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캠브리지 시절의 그는 빼어난 조정 선수였다고 한다.
그는 1914년에 결혼해서 2녀 1남을 낳았고, 이런저런 학교에서 강의하고 에세이를 쓰는 등 비교적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1911년에 몽블랑을 등정하는 등 등반가 겸 산악 에세이스트로서도 꽤 이름을 알렸다. 1921년 그는 강의하던 학교에 사표를 내고 영국 에베레스트위원회가 조직한 ‘정찰탐험대’에 합류했다. 그 해와 22년 두 차례 등정 실패. 37세였던 24년 6월 등정은 그의 세 번째 도전이자, 사실상 그의 마지막 기회였다. 그와 파트너 앤드루 어빈은 그날 정상에서 불과 245m를 남겨둔 지점에서 마지막으로 관측된 뒤 실종됐다.
BBC 등이 조직한 ‘맬러리- 어빈 탐사대’가 1999년 5월 1일 정상 인근에서 맬러리의 시신과 장비를 거의 완벽한 상태로 발견했다. 하지만 등정 여부를 밝혀줄 결정적 열쇠라 여겨졌던 그의 코닥 폴딩 카메라는 거기 없었다. 늘 지니고 다녔다는 아내의 사진도 품에 없었다. 그가 그 사진을 정상에 두고 내려왔으리라 믿는 이들이 지금도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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