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서방파의 책사이자 경호실장”
김태촌의 그림자처럼 움직였던 ‘주먹계의 큰손’이 과거를 청산하고 기독교 목회자로서 새 삶을 시작한 사실이 알려져 종교계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해당 인물은 기독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평동노회(총회장 정용철 목사) 소속 최바울(최만호) 목사.
그는 지난 3월19일 서울 머릿돌신학원 광현교회(영등포구 대림로)에서 ‘회개의 눈물’로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인생길’로 들어서게 됐다.
그래서일까. 소속 교단에서는 “그 어떤 죄인도 주님의 아들로 거듭 태어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며 반전의 드라마를 쓴 그를 ‘참회의 재활인물’로 반가워하는 눈치다.
최 목사는 ‘전국구 폭력조직’으로 악명 높던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의 ‘책사’이자 ‘경호실장’으로 활동했던 인물.
그를 조직원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고향(전북 부안)의 주먹 선배인 백 모씨로 알려져 있다. “주먹도 야물고 머리도 야물다”고 본 그를 2006년에 김태촌의 ‘책사’로 천거하게 됐고, 김태촌과 의기투합이 이루어져 그는 일약 ‘전국구 폭력조직의 싱크탱크’가 됐다.
“형님이 신복(臣僕)은 많지만 심복(心僕)은 없다고 고민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형님을 통해 ‘건달세계의 변화’를 새롭게 모색해보기로 작정하고 동참하게 됐지요.”
김태촌을 여전히 ‘형님’으로 깍듯이 호칭하는 최 목사의 범서방파 가담 이유다. 김태촌을 만나기 전 그는 이미 석사학위 취득에 이어 박사학위 과정도 수료했을 만큼 학구파였다.
그 이전인 1980년대 중후반 대학시절에는 지방 모 대학의 직선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돼 6월 민주항쟁에도 참여한 열혈청년 민주투사이기도 했다.
이후 여의도 정치에 뜻을 두고 정가에서 활동한 ‘경력’들까지 차례차례 쌓여짐으로써 최 목사는 주먹세계에서는 보기 드문 ‘먹물’로 인정받으며 수사당국의 요시찰 인물이 돼야 했다.
◇‘모태신앙 김태촌’의 영향으로 성경 마테복음 이틀만에 암송
그런 그가 기독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별’을 달고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면서부터. “김태촌 형님이 예수님의 족보를 암송하기에” 예수의 족보가 기록된 마태복음 1장1절에서 25절까지 이틀 만에 암송해 버렸다.
“형님은 모태 신앙자였습니다. 아버지가 전도사, 어머니가 권사님이셨지요. 하지만 형님의 부모님이 노점상을 하실 때 동네 깡패들이 과일리어카를 때려 부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울분을 참지 못한 형님이 교회로 달려가 유리창을 모두 깨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부인하며, 교회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오해한 것이지요.”
최 목사에 따르면 김태촌은 중학교(고등공민학교) 입학 당시 전교 2등을 할 만큼 수재였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중학교를 중퇴한 김태촌은 광주 등지를 떠돌다 1970년대 들어 서울로 상경하면서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영향을 받아 다시 기독교 신앙생활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 목사는 2013년 김태촌이 세상을 떠남을 계기로 주저 없이 주먹세계를 떠났다. 김태촌과 함께 외국을 돌며 조직원들이 향후 떳떳한 사회인으로 살 수 있도록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보겠다는 꿈과 목표가 사라진 결과이기도 했다.
“그 후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고 목회자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지은 죄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을 회개의 길로 안내하는 것을 사명으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가 2007년도부터 지금까지 11년간 매일 마태복음 1장1절에서 25절까지를 1~2차례 암송하는 것은 그 같은 사명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검은 손’을 씻고, 목회자로 새롭게 출발한 그는 이제 각종 전도활동을 통해 새로운 삶을 역설하려고 한다.
또한 “방황하는 청소년 청년들에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라는 하늘의 진리를 전하려 한다. 그에게 ‘성(聖)어거스틴의 기도’가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승철 뷰티한국 편집위원 cow242@beautyhankook.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