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푸르구나!’라는 노랫말처럼 5월엔 본격적으로 녹음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청명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봄볕을 맞다 보면 당장에라도 운전대를 잡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특히 석가탄신일, 어린이날 등 휴일이 이어지는 이번 5월은 싱숭생숭 마음이 들뜬다.
전북 고창은 유독 5월과 잘 어울린다. 중순까지 청보리밭 축제가 열리고, 선운산 도립공원엔 갖가지 나무와 식물들이 꽃을 피우며 녹색 옷으로 갈아입는다. 서해안 쪽으로 가면 갯벌과 해수욕장도 있어 이른 물놀이를 즐기기에도 좋다. 고창은 서해안 고속도로에 걸쳐 있지만, 여유가 있다면 새만금 방조제와 변산반도의 해안 드라이브도 추천한다. 누구에겐 고창이 생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고창을 엿보았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청보리밭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너의 모든 날에, 그게 뭐든 나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더라도 당신의 말에, 뭐든 나도요.”
지난겨울 뜨거운 인기를 끌었던 tvN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의 마지막 회에서 도깨비 김신(공유)과 지은탁(김고은)은 메밀꽃밭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극 중에서 도깨비의 소중한 공간으로 묘사되는 메밀밭은 매회 중요한 장면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정말 저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환상적이어서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같았던 그곳은 청보리밭 축제로 유명한 전북 고창 학원관광농원이다. 이곳은 봄엔 청보리, 여름엔 해바라기, 가을엔 메밀로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도깨비’에서 등장한 메밀밭 장면은 모두 메밀꽃이 활짝 피는 9월에 몰아서 촬영했다. 한편, ‘웰컴 투 동막골’, ‘도리화가’, ‘사임당’, ‘육룡이 나르샤’ 등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이곳 일대에서 일부 촬영됐다.
지금은 청보리가 한창이다. 고창은 과거에 ‘보리마을’이라고 부를 정도로 보리농사가 잘 되는 지역이다. 학원관광농원과 주변 농가의 보리밭 면적만 약 100만㎡에 달한다. 2004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이맘때마다 ‘청보리밭 축제’를 열어 평균 5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올해 역시 5월 14일까지 ‘제14회 고창 청보리밭 축제’를 연다.
축제가 열리는 보리밭 가운데엔 봄기운을 뿜어내는 유채꽃밭이 터진 노른자처럼 펼쳐져 있다. 관광객들은 어린아이 키만큼 솟아있는 노란 꽃줄기 속에 파묻혀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다. 가장 바쁜 건 이꽃 저꽃을 오가는 꿀벌이다. 꽃밭 사이로 난 길을 걷다 보면 귓가에서 “왱왱”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꽃 위에선 수많은 벌이 봄볕을 받으며 폭식 중이다.
고창 청보리밭 축제위원회는 이 일대를 테마가 있는 둘레길로 개발했다. 축제의 중심 지역인 1.8㎞의 ‘보리밭 길’은 모든 구간이 포장돼 있고 경사가 완만해 유모차나 휠체어도 쉽게 다닐 수 있다. 작은 숲을 두르는 ‘가로수 길’에선 나무들이 쏟아내는 피톤치드를 받으며 산책할 수 있다. 저수지를 품은 길도 있다. 이곳엔 시골 특유의 정취와 물가의 운치가 있다. 보리밭 사이론 여러 갈래의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축제 관계자는 “탐방로를 벗어나면 보리를 밟아 쓰러트릴 수 있으니 꼭 정해진 길을 이용해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트랙터를 타고 보리밭을 질러 달릴 수도 있고, 마차를 타고 보리밭 둘레를 돌아볼 수도 있다. 청보리밭은 무료로 둘러볼 수 있고, 축제 기간 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도 닦듯 거닐기 좋은 선운산 도립공원
1990년 정지영 감독이 연출한 ‘남부군’은 실제 빨치산 토벌을 소재로 한 영화로 남북 분단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당시 꽤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묘사로 극찬을 받아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 남우주연상(안성기), 남우조연상(최민수) 등을 싹쓸이했다. 극 중 빨치산의 아지트 등 주요 배경으로 나왔던 곳이 고창 선운산이다. 특히 산 정상과 용문굴 일대는 수려한 산세 그 자체로 천혜의 영화 세트장이 됐다. ‘남부군’은 제작 기간만 3년이 걸렸고 엑스트라가 3만 명이 동원되는 등 당시 한국영화계의 블록버스터로 만들어졌고,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었다.
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선운산은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원래 이름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이란 뜻의 도솔산이었다. 백제 시대 때 선운사라는 절이 지어지면서 선운산이라고 됐는데, 도솔이나 선운이나 모두 불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총 4개의 코스로 나뉜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왜 불도에 어울리는 산인지 쉽게 이해가 간다. 세상을 끊어 놓은 듯한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에 둘러싸여 걷다 보면 잠시나마 세속적 번뇌를 잊게 된다.
선운사로 향하는 평지에 조성된 산책로 또한 훌륭하다. 곳곳에 소나무, 팥배나무, 술패랭이, 조팝나무, 동백나무 등 다양한 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알 수 없는 새들이 여기저기서 화음을 만들어 산책하기 좋은 BGM을 선사한다. 5월엔 하늘 위에서 누군가 녹색 물감을 흘려 놓은 듯 푸르름으로 가득하다.
고창=조두현 기자 joe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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