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은 기본적으로 글과 그림이 결합한 장르이지만 글자 없는 그림책도 있다. 우리나라의 창작 그림책은 짧은 기간에 높은 수준으로 발달해서 이제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고, 다양한 개성과 매력으로 어린이 독자와 어른 독자를 두루 확보하고 있다. 박해련의 동시 ‘플라타너스 문지기가 서 있는 병원’을 거듭 읽으면서 나는 그림책이 떠올랐다. 이 시의 구절들이 차례차례 그림책 글로 변환될 수도 있겠지만, 시가 펼치는 장면을 글자 없이 재현하면 더 멋진 그림책이 될 것 같았다.
길거리 모퉁이에 작은 구둣방이 있고 그 앞에 키 큰 플라타너스가 듬직하게 자리잡았다. 구둣방 안에는 목이 긴 낡은 구두를 수선하려고 엄마와 아이가 함께 와 앉아 있다. 수수하게 차려 입고 얼굴은 둥글둥글 순한 모녀다. 구둣방을 지키고 있던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은 엄마 구두를 받아 상처 난 목을 살펴보고 진찰한다. 두 사람은 손가락을 움직여 수화(手話)로 이야기한다. 의사 선생님의 둘레에는 재봉틀과 가위, 풀, 가죽 조각 등 아픈 구두를 치료할 수 있는 재료와 도구들이 익숙한 위치에 놓여 있다. 간호사가 옆에서 거들어주고 의사 선생님은 능숙한 손길로 재봉틀을 돌려 구두를 깁는다.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처럼 가운데 자리한 구두를 깁는 재봉틀 주위로 네 사람이 둘러앉아 있고, 낮은 천장에는 전등불이 흔들리고 있어도 좋다.
“창밖엔 눈옷 껴입은 플라타너스가/황소바람 들락거리는 창틈 기웃거리며/비둘기 둥지만 한 농아 부부 병원을/꼬옥 끌어안고 서 있”는 정황은 중간중간 장면에 날리는 눈발과 창문을 덜컹거리며 스며드는 겨울바람으로 표현하고, 마지막에 원경으로 눈 덮인 플라타너스 아래 역시 눈에 덮여 가는 작은 구두병원을 묘사하면 될 것이다. 어떤가. 글자 없는 멋진 그림책이 되지 않을까.
화려한 백화점이나 번듯한 상가 건물에 입주한 가게가 아니라 길거리에 조그맣게 자리잡은 소박한 구둣방, 수화로 대화하며 서로 도와 구두 수선을 하는 부부, 낡고 해진 구두를 손질해 신으려고 찾아온 엄마와 아이. 이런 삶의 풍경은 희귀한 것 같지만 내 삶에서 한 꺼풀 장막을 걷어내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를 지켜 줄 든든한 문지기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이구 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