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원주에는 무려 800년쯤 된 은행나무가 있다. 반계리란 곳에 있어 ‘반계리 은행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는 노거수(老巨樹)를 처음으로 본 건 3년 전 겨울이었다. 잎은 다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한 은행나무는 밑동에 난 커다란 구멍 때문에 마치 고사목처럼 보였다. 어두컴컴한 구멍 속에는 박쥐 떼라도 보금자리를 틀고 있을 것 같았다.
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날, 나는 한 시인과 함께 그 은행나무를 다시 보러 갔다. 거대한 나무에는 연둣빛 잎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은행나무 아래 서서 무수히 돋아나는 잎들을 쳐다보고 있자니, 온 하늘이 연둣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은행나무 아래 난쟁이처럼 서 있는 우리도 연둣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몇 년 전 내가 처음으로 이 노거수를 보았을 땐 죽은 고목나무 같았는데!” 내가 은행나무를 쳐다보며 문득 입을 열자, 함께 동행한 젊은 시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고사목으로 보일 정도로 폭삭 늙었지만, 아직도 써야 할 청춘이 남았나 봅니다.”
그날 은행나무를 보고 온 뒤 나는 젊은 시인이 한 말을 자주 떠올리곤 한다. ‘아직도 써야 할 청춘이 남았나 보다’라는 말. 이 은행나무처럼 연륜이 오래된 나무는 있지만 늙은 나무란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 나무는 늘 청춘이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나이를 먹으면서 쭈글쭈글 주름도 늘어나고 관절도 점점 쇠약해지지만 사람의 마음은 늙지 않는다. 타성에 젖지 않고 늘 생생히 깨어 있는 마음은 말이다. 이런 마음을 지닌 자에게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다. 고목이라 불리는 나무 둥치에서 파릇파릇 피어나는 봄날의 새순처럼 아직 써야 할 청춘이 남아 있으니까.
나는 창조적 삶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아직 써야 할 청춘’이 남은 그 은행나무를 생각한다. 창조적 삶이란 무엇인가. 누가 새 시집을 출간하거나 새로운 예술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때 ‘산고(産苦)’를 치렀다고 치하하듯, 무언가 새로운 것을 낳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누가 낳을 수 있는가. 생기발랄한 정신을 지닌 자만이 낳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몸은 노쇠해도 정신의 자궁이 파릇파릇한 이만이 낳을 수 있다.
중세 사람인 마이스터 엑카르트라는 수도승은 자기가 꿈 꾼 얘기를 들려준다. “나는, 비록 내가 남자이기는 했지만, 여인처럼 아이를 임신했던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나는 무(無)를 임신했었습니다. 이 무에서 하느님이 태어났습니다.”
나는 이 수도승의 꿈 얘기를 신학적으로 해석할 생각이 없다. 다만 나는 이 얘기를 통해 인간 속에 내재한 무한한 창조성을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이 무한한 창조성을 찬미하지 못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찬미하기는커녕 창조성을 살해하고 있다. 예컨대 박근혜 정부에서 일어난 블랙리스트 사건이 곧 그것이다. 블랙리스트 사건의 본질은 예술가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창조성을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 억압하고 살해하려 했던 것. 예술가의 창조성을 말살하면서 창조경제, 문화융성이란 그럴 듯한 구호를 앞세웠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가소로운가. 그것은 세상을 살리는 창조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세상을 해롭게 하는 부패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달하며 뇌 용량만 커진 인간의 부패한 상상력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지식과 정보의 양은 늘어났지만 지혜는 나날이 쇠퇴하는 이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대자연이라는 큰 경전의 가르침에서 세상을 살아갈 지혜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노자도 <도덕경>에서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 하지 않았던가. 언거번거할 것 없다. 고목이라 불리지만 여전히 봄이 되면 새 생명을 낳는, ‘아직 써야 할 청춘’이 남은 은행나무야말로 우리를 창조적 존재로 살도록 추동하는 위대한 스승이 아닌가.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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