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4.27
한국전쟁 휴전협정 체결 석 달 전인 1953년 4월 27일,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이 일본과 한국 등 14개 라디오 방송을 통해 꽤나 노골적인 심리전을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종살이에서 해방돼 새로운 삶을 원하는 모든 용감한 파일럿들에게(…)”로 시작된 그 선무방송은 전장의 단골 레퍼토리인 귀순 권유인 듯 보였지만, 내용은 훨씬 파격적이었다. 일단 그 대상이 당시 소련의 최신예 전투기 미그(MIG) 15기 조종사였다. 결함 없는 미그기를 몰고 귀순할 경우 조종사에게는 5만 달러를 주고, 첫 귀순자에게 한해 5만 달러를 보너스로 지급한다는 것. 한국전쟁 유엔군 마지막 작전인 ‘물라 작전(Operation Moolah, ‘moolah’는 돈의 은어)’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게 무슨 ‘작전’씩이나 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복잡한 심리 전술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때는 휴전 직전이었고, 한 뼘 땅을 두고 사활을 건 전투가 전개되고 있었다. 51년 11월 전선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구소련 미그 15기는 미 공군 주력 F-86 세이버(Sabre)에 비해 최고속도는 느렸지만, 1만m 이상 고도 기동력과 급강하 능력면에서 앞섰다. 소련이 공식 참전국이 아니어서 소수의 파일럿과 전투기만 제공한 탓에 중공 및 북한군 조종사들의 조종능력이 미군의 전투 비행능력에 밀렸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무거운 37미리 포까지 갖춘 미그 15기의 공격 능력은 미 공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당시 미군은 미그 15기의 제원 및 성능에 대한 정보가 사실상 전무했고, 그건 한국전쟁으로 해소될 문제가 아니었다.
또 단기적으로는 적 진영을 교란하는 효과를 낳았다. 방송 직후 8일 간 미그 15기의 작전이 없었던 것은 다급하게 제기된 파일럿 이념점검 필요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B-29 슈퍼포트리스는 방송 내용을 기록한 120만 장의 삐라를 당일 공산진영 공군 기지가 있던 압록강 유역에 뿌린 것을 시작으로 신의주 의주 등지로 전단을 실어 날랐다.
북한 인민해방군 공군 상위(중위와 대위 사이 계급) 노금석이 자신의 ‘레드 2057’ 미그 15기를 몰고 김포 공군기지로 귀순한 것은 휴전협정이 체결(7월 27일)된 뒤인 그 해 9월 21일 오전 10시였다. 미그기는 즉각 분해된 뒤 다음 날 C-124 수송기에 실려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로 이송됐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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