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앞의 쥐라고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에게 덤비기도 한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을 때조차 최선을 다하는 까닭이다. 목숨이 걸렸을 때는 안 되는 줄 빤히 알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애쓴다. 생명을 지키려는 절실함이 종종 기적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근자에 한국은 고양이 앞의 쥐만도 못하게 취급 당했다. G2라 불리는 두 나라가 번갈아 가며 한국을 우롱했다. 중국 시진핑 주석이 했다는, 한반도가 과거 중국의 일부였다는 발언이 전해지면서 여론이 들썩였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아무리 파격적이라고 해도 이런 민감한 발언을 근거 없이 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런데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국 국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답변만 딸랑 내놓았다. ‘우리 중국이 고양이면 너희 한국은 쥐야. 그러나 걱정은 안 해도 돼’라고 말한 셈이다.
미국도 만만치 않았다. 호주를 향해 가던 항공모함 칼빈슨 호가 곧 한반도 해역으로 진입한다고 했다. 미군 측 관계자들도 이를 확인해줬다. 한반도 주변에 세 척의 미 항모가 집결하는, 유사 이래 최대의 화력이 갖춰지려는 순간이었다. 일본 아베 총리는 잽싸게 숟가락을 얹었다. 자국민 피난을 위한 자위대 한반도 진입을 운운하며 긴장도를 높여갔고, 부인의 비리 사건으로 떨어진 지지율을 높이는 데도 성공했다. 안 그래도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북핵 선제 타격론이 목소리를 키워왔던 터라 전쟁의 공포가 빠르게 번져나갔다.
“아빠, 전쟁 나면 우린 어떡해”라며 한 근심하는 아들을, “영화 <국제시장> 봤지. 우리에겐 부산이 있잖아. 무슨 일이 생겨도 부산에서 만나면 돼”라며 다독일 무렵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칼빈슨 호는 예정대로 호주로 가고 있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뉴스였다. 칼빈슨 호가 한반도에 바로 온다는, 세 척의 항모가 한반도 주변 해역에 집결한다는 소식이 ‘가짜 뉴스’였던 것이다. 다만 그렇고 그런 가짜 뉴스가 아니라 ‘한국 국민을 안심시키시고자 미국께서 몸소 베풀어주신 영광스런’ 가짜 뉴스였다.
그런데 진짜로 고양이 앞의 쥐가 될 수 있는 위기에 처했건만,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취해진 국가 차원의 움직임이 안 보인다. 어디서도 국가 생존을 위한 절실함이 감지되질 않는다. 늘 그랬듯이 이 국면을 자기 이해관계와 기득권 옹호에 유리하게 활용하려는 이들의 ‘가짜 목소리’만 증폭되고 있다. 단지 수사나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국제무대란 장기판의 졸로 취급되고 있음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대선에서 악용하고 있다.
물론 한국 ‘국민’마저 졸이 된 건 결코 아니다. 매사를 정치적, 물질적 유불리만 따지는 이들 탓에 한국 ‘국격’이 그렇게 됐을 따름이다. 그들은 나라가 있기에 힘과 돈을 지닐 수 있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나라가 해준 건 없어도 자기가 나라에 해준 것은 많다고 여긴다. 하여 자신들이 있었기에 나라의 오늘날도 가능했다고 믿는다. 그렇게 자기 이익을 국가 이익과 동일시하기에 나라가 대국 틈에서 졸이 되어도 자신들이 계속 잘 나가면 국가도 잘 나간다고 간주한다.
그들은 전근대기 봉건군주처럼 곧잘 ‘내가 곧 국가’라고 확신한다. 민주주의체제임에도 ‘내가 곧 국민’이라고 자신한다. 그들은 자신의 승리를 국가나 국민 승리로 여길 줄은 알아도, 국민은 승리하고 자신이 패배하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 맹자는 자나깨나 국가의 부강만 되뇌는 군주에게 백성이 잘살아야 국가가 부강한 것이지 군주 혼자 잘산다고 국가가 부강해지는 건 아니라고 단언했다. 황당하게도 우리 시민들은 2,300여 년 봉건군주제 시절의 비판이 여전히 유효한 시절을 살고 있다.
선거철만 되면 필자는 ‘무국적자’가 된다. 출마하는 이들마다 국민이 원해서, 나라를 위해서 나섰다고 부르댄다. 어떤 이는 자신들이 이 나라를 만들어왔다고 강변하고, 다른 이는 자신의 승리가 곧 국민의 승리라고, ‘촛불 민심’의 승리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필자는 그들의 출마를 원한 적도 없고 그들을 위해 촛불을 든 적도 없으며 그들이 만든 나라가 아닌 일반 시민이 만든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자는 ‘국민’이 아니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장기판의 졸로 전락시키곤 하는 이 나라가, 그들에겐 국민도 아닌 필자에게는 더욱 절실해진다. 저들에게 나라는 자기 이익을 위해 버릴 수 있는 것일지 몰라도 일반 시민에겐 결코 그렇지 않다. 자국민도 제대로 안심시키지 못하는 중국 정부로부터 생뚱맞은 위로를 받은 우리 시민이지만 그래서 더욱 더 나라가, 또 그 품위와 역량이 요긴하고 절실하다.
원칙적으로 민주적 국가가 자율적 시민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제도적 바탕이기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인간적 삶의 영위에 필요한 적정 수준의 힘과 돈을 지니는 데 나라의 품위와 역량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곧 국가요, 국민이라고 우기는 적폐를 청산하는 데도 요긴하기에 그렇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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