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4.24
이승만의 마지막 발악이 조봉암 사법살인(59년 7월 31일)이었고, 박정희의 첫 패악이 조용수 사법살인이었다. 정치인이자 진보 신문 ‘민족일보’를 창간한 언론인이던 그는 5ㆍ16 군사쿠데타 이틀 뒤인 5월 18일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죄목은 조총련계 자금으로 신문을 창간해 북한의 평화통일 선전을 일삼았다는 거였다. 그는 61년 상고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고, 12월 21일 조봉암이 섰던 그 자리에서 교수형 당했다.
경남 진주(옛 진양군 대곡면)에서 태어나 진주중과 대구 대륜고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한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51년 일본 메이지대(明治大) 정경학부에 편입했다. 53년부터 재일본 한국학생동맹 문화위원으로 활동했고, 졸업 후에는 한국거류민단(민단) 중앙총본부 차장이 됐다. 59년 조봉암 구명운동에 나섰다가 민단 지도부에 밉보여 지역 지부로 좌천됐지만, 조총련의 재일한국인 북송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주도하기도 했다.
60년 4ㆍ19 혁명 직후 귀국한 그는 5대 총선에 진보정당 사회대중당 후보로 경북 청송에서 출마해 낙선했고, 이듬해 2월 일간신문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민주주의의 대중적 저변을 확대하고 민주 통일과 진보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알려야겠다는 게 그의 뜻이었다.
그의 신문은 보수적인 장면 민주당 정권과 대립했고,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 규제법’을 언론 탄압 2대 악법으로 규정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창간자금 의혹은 그 무렵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다. 훗날 확인된 바 자금은 조봉암의 비서였던 이영근이 재일교포들을 대상으로 모금한 돈이었으나, 신문 논조가 반공주의의 민단 주류 이념과 사뭇 다른 건 사실이었다. 그는 이념 너머의 민족과 민중, 자유와 진정한 독립을 추구한 진보 언론인이었다. 61년 말 민족일보는 공보부 집계 발행부수 4만여 부로, 신생지로서는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기록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민족일보와 조용수를 탄압한 것은 박정희 자신의 좌익 경력을 불식시키기 위해 취한 선제 조치였다는 설이 있다. 국제신문인협회(IPI)등의 항의성명 등 구명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형됐고, 2008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았다. 그는 1930년 4월 24일 태어나 고작 31년을 살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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