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한참 일본식 정서를 담은 미식 만화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덕분에 우리 가족도 ‘미스터 초밥왕’ ‘맛의 달인’ 등의 일본 만화를 섭렵하곤 했다. 당시 나는 아직 어려 요리를 직접 해본 적도 없었을 뿐더러 밥을 자유롭게 사 먹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이 만화들을 열심히 읽었지만, 만화에 나오는 음식을 대부분 먹어본 적도 심지어 보거나 들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신기한 먹거리가 잔뜩 나와 흥미를 유발하고, 캐릭터들이 몹시 경탄하니 맛을 지레짐작할 수 있었던 것 외에도 만화적인 카타르시스를 주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결정적으로 책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부보다는 훨씬 재미있었다. 열심히 읽을 수밖에.
이런 요리만화를 읽던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꼭 이런 만화에는 등장하는 ‘미각왕’의 현존 여부였다. 그들은 천부적인 미각으로 한 입만 맛봐도 이 참치를 무슨 칼로 썰었는지, 여기 한 점 묻은 된장이 지리산에서 왔는지 후지산에서 왔는지를 맞춘다. 그 신기에 가까운 능력 덕분에 ‘미각왕’은 사회적으로 최고의 위치에 있고, 일생을 요리에 바친 장인들이 산해진미를 구해 정성스럽게 만든 요리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비판하고 심지어 가끔 집어던진다. 이들은 심사위원으로 초빙되어 밥을 한술 먹고 난데없이 바다나 산기슭이나 어머니의 손 주름 같은 것을 떠올리며 감탄하거나 손뼉을 치거나 눈썹을 부릅뜨는 게 일이며, 결정적으로 평소에는 별일 없이 빈둥거리며 논다. 어린 나에게는 충격적인 설정이었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이나 어른들은 전부 김치찌개는 김치 맛이고 된장찌개는 된장 맛이며 소금은 짜고 설탕은 단 사람들뿐이었다. 그래서 현실에 정말 '미각왕'이 존재하고 실제로 지금도 놀고먹고 있는지, 나는 너무 궁금했다. 결국 어느 날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현실에서 이런 독보적인 '미각왕'이나 '미식가'가 실제로 존재합니까?”
아버지는 약간 생각하다 바로 대답했다.
“음. 세상에 미식가라는 것은 말이다. 결국 많은 음식을 먹어 본 사람이어야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많은 음식을 먹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걸 찾아서 먹으려면 시간도 필요한데, 그것도 결국 돈이다. 누구나 소금을 먹으면 짜겠지만, 비싼 소금을 신경 써서 다양하게 많이 먹어본 사람은 ‘어라?’ 이러면서 그걸 좀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다. 그렇게 동서고금과 오대양 육대주의 다양한 음식을 돈을 들여서 많이 먹어본 사람은 결국 시야가 넓어져 미식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고, 같은 밥을 먹어도 뭐라도 한 마디 더 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깐 ‘미각왕’이나 ‘미식가’라는 건 다 돈놀이란 말이다. 너도 돈 많이 벌면 여유 있게 밥 한술 뜨고 바다나 산기슭이나 어머니의 손 지문 같은 것을 떠올리면서 감탄하고 빈둥거릴 수 있으니, 일맥상통하는 말 아니겠느냐. 그러니 인아, 독보적으로 돈을 많이 벌어라.”
나는 그 이후로 요리만화에 나오는 ‘미각왕’을 ‘부자’라는 개념으로 한동안 독해해왔다. 어느덧 나는 돈을 버는 어른이 되었고, 아버지가 남긴 말을 가끔씩 생각한다. 지금도 당신이 정의한 ‘미식가’의 개념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당시의 아버지는 분명 삶이 팍팍하다고 느끼셨음에는 틀림이 없다. 내가 어른이 되자, 두 아이를 둔 먹고 살기의 고단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렇다면 그 고단함과 완전히 동떨어진 만화 속 별세계를 보곤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분개할 수도 있을 것도 같고, 그러면 당신께서는 아직 아이는 알아듣지 못할, 무엇인가 억울한 것도 같고 읍소하는 것도 같은 세상 한탄을 하고 싶으셨으리라. 그래서 어른이 된 나에게 그 대사는 아직도 웃기면서도 슬픈, 그런 것으로 남아있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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