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말이 없던 그녀가 폭발한 순간
그녀가 왜 과묵했나 이해돼
●가족의 탄생
“왜 그래 나한테” 끝없는 말싸움
흔한 대화라도 곱씹게 만들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너 처음 봤을 때 종소리 들렸어”
작업 대사가 다른 의미로 들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두 가지 비법이 있다. 평범한 사람을 특별한 장소에 들어가게 하거나, 특별한 사람을 평범한 장소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던 월터가 그린란드로 날아가서 엄청난 모험을 벌이게 되는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앞쪽의 예라면, 세기의 여배우 애나 스콧이 허름한 여행 전문 책방에 들렀다가 운명의 남자를 만나는 영화 ‘노팅힐’이 뒤쪽의 훌륭한 예가 될 것이다. 두 개의 꼼수만으로 작품을 만들 수는 없지만, 이 비법들은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물음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란 무엇인가. 특별한 장소는 어디인가. 특별한 사람은 누구이며, 평범한 장소란 어떤 곳인가.
두 가지 비법은 재미있는 대사를 만들어내는 데에도 긴요하게 쓰일 수 있다. 착한 말만 쓸 것 같은 사람이 욕을 하거나, 욕만 쓸 것 같은 사람이 착한 말을 할 때 듣는 사람을 당황시킬 수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에서 악당 줄스는 사람을 죽이기 전에 에스겔 25장 17절을 외운다. “의인의 길은 사면이 열렸으나 악인의 사욕의 길은 막히리라. 착한 사람은 축복을 받아….” 영화를 보는 관객은 혀를 찰 수밖에 없다. 상황에 맞지 않는 어이없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던 관객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줄스가 읊조리던 성경 구절이야말로 영화 전체의 내용을 요약한 문장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좋은 대사란,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별 게 아닌 것처럼 들렸지만 뇌리에 박혀서 좀처럼 빠져나가지 않는 문장들.
‘만추’
한국 영화계에서 대사를 가장 잘 쓰는 감독을 꼽으라면,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최동훈, 류승완, 김태용 감독의 이름을 거론하겠다. 그러지 말고 한 명으로 압축해보라고 한다면, 단연 김태용 감독이다. 김 감독은 재치 넘치는 대사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3년 곰삭은 장아찌 같은 맛을 낼 때도 많다. 초기작을 제외한 최근작들에서 김태용 감독의 대사가 허투루 쓰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영화 ‘만추’는 손에 꼽을 정도로 대사가 적다. 전체적인 대사가 적다기보다 주인공 애나(탕웨이)의 대사가 적다. 애나는 남편을 죽이고, 살인죄로 감옥에 갇히지만 그녀의 (제대로 된) 첫 대사는 15분이 지나서야 등장한다. “전화번호가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주인공 훈(현빈)은 계속 종알대고, 묻고, 떠들어대지만 애나는 시종일관 과묵하다. 애나 주변에는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뿐이다. 어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가석방을 받아 들르게 된 고향에서도 사람들은 소리 높여 싸우고 떠들어댄다. 관객은 애나가 내는 목소리와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옷가게에 들러 아름다운 옷을 사고, 막혀 있던 귀의 구멍에 귀고리를 달고, 한가하게 거리를 둘러보던 애나가 갑작스러운 벨소리에 놀라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을 때, 위치와 전화번호를 대라는 간수에게 “2537번! 시애틀입니다.”라고 굳은 목소리로 말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무너져내리는가. 우리는 애나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세상의 쓰레기 같은 소음으로부터 고립된, 과묵한 그녀를 동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훈에게 과거사를 털어놓을 때 애나는 말이 많아진다. 자신의 옛 사랑에게 ‘왜 다른 사람의 포크를 썼냐’며 화를 낼 때, 마치 자신이 포크라도 되는 양 소리치며 흥분할 때, 영어로 시작한 분노가 중국어로 변할 때, 애나는 말이 많아진다. 말이 없던 애나가 폭발하는 순간, 우리는 어째서 그토록 애나가 말이 없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말하자면 애나는 가장 작은 삽으로 가장 깊은 우물을 파는 사람이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그 우물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영화 ‘만추’를 보고 나면 포크 장면과 ‘하오(좋네요)’와 ‘화이(안 좋네요)’라는 단어를 잊을 수 없다. 가장 격렬한 순간에 어이없는 대사들이 난무하고, 가장 내밀한 순간에 뜻 모를 대화가 이어진다. 대사는 정확하게 쓰이지 않지만, 정확한 자리에 있을 때보다 우리에게 더 큰 울림을 준다. 그런 게 좋은 대사가 아닐까.
‘가족의 탄생’과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김 감독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 선경(공효진)과 준호(류승범)가 말싸움을 벌이던 장면이 생각난다. 한 사람이 묻는다. “너, 왜 그래 나한테?” 한 사람이 대답한다.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 다시 묻는다. “나? 넌 왜 그래 나한테?” 끝없을 물음들에서 우리는 상황의 답을 찾지는 못하지만 각자에게 물어보게 된다. 우리는 대체, 서로에게, 왜 그러는 걸까? 민규동 감독과 함께 만든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수많은 남자들이 여성에게 ‘작업’을 걸기 위해 써 먹었을 듯한 대사 “너 처음 봤을 때 굉장히 큰 종소리가 들렸어”를 완전히 다른 소리로 들리게 만들었다. 김 감독은 모든 대사를 곱씹어보게 만든다. 그가 만드는 다음 영화도 궁금하고, 그 속에 들어 있을 대사들도 빨리 들어보고 싶다.
김중혁 소설가·B tv ‘영화당’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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