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과거에 썼던 기사를 좀 돌이켜 봐야겠다.
지난해 11월 초, 미국 대선이 막바지로 접어들었을 때다. 당시 ‘트럼프가 이기면 세계경제 시계제로’라는 기사를 썼다. 트럼프가 되면 불확실성이 커져 미국 주가(S&P500 지수)가 하루 만에 11~13% 폭락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며칠 후에도 비슷한 기사를 썼다. 한 전문가 분석을 빌어 “트럼프가 당선되면 세계경제 성장률이 0.7~0.8%포인트 하락하고 2017년 한국 성장률 전망치도 2.7%에서 2.1%로 급락할 것”이라는 예측을 담았다.
다 틀렸다. ‘모두 그렇게 예상한 거 아니냐’고 자위하기엔, 상황이 거꾸로만 간다. 경제를 말아 먹고 곳곳에서 안보위기를 일으킬 것 같았던 트럼프의 세계 전략은 의외로 정확하게 먹히는 중이다. 미ㆍ중 정상회담 이면이 공개되진 않았지만, 외견상 트럼프는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지 않는 대신 북핵 문제에서 상당한 협조를 이끈 것으로 보인다. 정상회담 이후 중국은 북한에 강한 요구를 계속하고 있는데, 시진핑 집권 후 중국이 저렇게 다급하게 북한을 재촉하는 것은 처음 보는 장면이다.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했던 것도 아니었다.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거야” 했던 큰소리를 취소한 대신 얻은 대가다. 실제로 중국에 아무 것도 내주지 않으면서, 트럼프는 오바마가 8년간 얻지 못하던 중국의 협조를 받았다. 불과 몇 달 전이었다면, 미국과 중국이 한 목소리로 북한을 압박하는 게 가능하리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좀 더 두고 볼 필요는 있지만, 동북아시아 ‘스트롱맨 대결’에서 트럼프가 초반 주도권을 확실히 잡은 분위기다. 미국을 무시하던 김정은, 미국 정책(사드)을 이유로 한국을 때린 시진핑, 보통국가로 회귀를 노리는 아베가 각축을 벌이던 동북아였는데, 갑자기 미국 대통령이 “이 동네 막무가내 왕은 나야”라며 나타나 상황을 정리하는 분위기다. 힘센 자의 막무가내가 얼마나 무서운 무기가 되는지 몸소 보여 준 트럼프다.
그러나 ‘미치광이 전략’이 중국과 북한에 통했다며 칭찬만 하고 앉아 있을 순 없다. 트럼프는 비슷한 수법을 계속 쓸 것이고, 김정은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 벼랑 끝 전략은 회차를 거듭할수록 효과가 반감된다. 지금은 놀라운 강자의 미치광이 전략도 시간이 가면 효용이 준다. 진짜로 물면 그 또한 큰 문제가 된다.
트럼프는 끝내 예측을 뒤집고 동북아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을까? 강자가 벼랑 끝 전술을 선택하는, 이 듣도 보도 못했던 작전은 북한이 정말로 핵을 포기하도록 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단숨에 날리는 의외의 성과를 거둘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트럼프는,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갓럼프’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명나라 만력제(임진왜란 때 대군을 파병한 황제)급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요행수와 상대방의 공포에 기댄 ‘치킨게임’이 해답이 되긴 어렵다. 분쟁 발생시 직접 피해당사자가 되는 한국 입장에서 ‘막무가내의 길’을 선택하는 건 너무 무모하다. 외국 지도자의 주사위 놀음에, 국민 불안은 커지고 경제는 출렁출렁할 것이다.
최근 미국이 세 번이나 금리를 올렸지만 시장이 흔들리지 않은 주된 이유는, 연방준비제도(Fed)가 항상 시장과 소통을 하며 다수가 금리를 올리리라 예측한 시점에 맞춰 금리를 조정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미래 역시 느리더라도 다음 단계가 예측 가능한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경제에서도, 안보에서도 예상 가능한 접근법이 나와야 할 때다. 한반도의 운명을 걸고 저마다 배포 자랑을 하고 있는 막무가내 ‘스트롱맨’들을 예측 가능한 협상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일, 그게 바로 다음 대통령이 가장 시급히 할 일이다.
이영창 경제부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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