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영웅’의 소신… “‘세월호 사건’ 잊을 수 없다”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 지하철에서 한 여성 승객의 엉덩이를 만지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까?” 한 여성이 용기를 내 치한에 다가가 그의 왼손을 잡은 뒤 검지를 부러뜨린다. 배우 박보영은 JTBC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에서 괴력을 지닌 도봉순으로 나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괴롭히고 무시하는 세상을 향해 통쾌한 일격을 날려 시청자들에 대리만족을 선사했다. 박보영은 도봉순같은 힘이 생기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을까?
“가벼운 말로 비칠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세월호를 들어 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드라마 종방 후 17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보영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정말 가슴이 아팠다”며 “영웅의 존재를 바랐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고도 했다. 박보영은 주말에 야외 촬영지로 이동할 때 광화문 광장을 지나쳤고 “그때마다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아직도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있고, 해야 할 일이 많잖아요. 그래서 잊을 수 없고요.”
“애교 많게만 봐”… 당찬 여성 주로 연기한 이유
되돌아보면 박보영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로 누군가를 지켰다. 영화 ‘과속스캔들’(2008)에서는 아들을, ‘늑대소년’(2012)에서는 철수(송중기)를 보호했다. 남성에 기대기보단 직접 나서 일을 해결하는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피 끓는 청춘’(2014)에서는 껌 좀 씹는 ‘싸움꾼 여고생’으로 나와 또래를 이끌기도 했다. 당찬 여성을 주로 연기한 박보영은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많은 사람이 애교 많고 여린 모습으로만 봐” 자신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어 선택한 결과다.
실제 성격도 당찼다. 박보영은 작은 체구 탓에 뭔가 일을 할 때 주위에서 ‘도와줄까?’란 말을 많이 들어 어려서부터 “아뇨. 제가 할게요”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충북 증평군에서 자란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혼자 올라와 연기 활동을 하다 보니 독립적인 생활에 익숙하다. 직업 군인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박보영은 “아버지 부대 초입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문구가 돌에 새겨져 있었고, 그 옆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며 “어려서부터 ‘일단 해 보고 안 되면 얘기해라’라는 말을 듣고 자라 주체적이 된 것 같다”며 웃었다.
“박보영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는 믿음
박보영은 지난해 ‘힘쎈여자 도봉순’ 기획안을 받고 도봉순이 ‘사투리 쓰며 주위 눈치 안 보는 당당한 여성 캐릭터’로 그려진 것에 반해 출연 제의를 수락했다. 5개월 동안 도봉순으로 살다 보니 “내가 도봉순인 것처럼 착각해 촬영장에서 소품을 하도 부러뜨려 ‘제발 가만히 좀 있으라’고 혼나기도” 했다. 박보영은 액션 장면을 찍다 왼쪽 손목을 다쳐 흉터가 생겨 이날 붕대를 감고 기자들과 만났다. 열 일곱 살에 2006년 드라마 ‘비밀의 교정’으로 데뷔한 그에겐 여유가 부쩍 늘었다.
“배우로서 제 한계를 당연히 알고 있어요. 캐릭터 변신에 대해 고민도 하고요. ‘아직 서른이 안 됐으니까’란 변명 뒤에 숨기도 하고요. 제가 찾은 답은 ‘내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예요. 조급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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