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하는 배 안에서 공포에 질린 아이들이 “선생님”하고 불렀을 때, 교사들은 자신을 버려서라도 학생을 구해야 한다는 ‘초월적 의무’에 순응했다. “사고일 뿐 내 책임은 아니다”라며 지위를 부지해 왔던 권력자들의 안하무인에도 이 사회가 불신의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힘을 준 사람들. 밝혀야 할 진실은 아직도 많은데 벌써 3년이다.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강민규
교감이었던 강민규(당시 52)씨는 침몰 당시 배 안에서 단원고 학생을 구하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녀 학생과 시민 20여명의 탈출을 도왔다. 구조 후 저혈당 쇼크가 왔지만 체육관에 남아 구조 상황을 지켜봤다. 그러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자책감 탓에 그는 진도 실내체육관 인근 야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갑에 있던 유서엔 “200명의 생사를 알 수 없는데 혼자 살기에는 힘에 벅차다. 나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달라. 내가 수학여행을 추진했다”고 적혀 있었다.
▦김응현
2학년8반 담임교사였던 김응현(당시 44)씨는 학생들을 갑판 출입구까지 인솔해 대피시켰다. “큰 배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며 다시 학생들이 있는 배 안으로 들어간 김씨는 스승의날을 하루 앞둔 14일, 학생들이 머물던 4층 선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제자들은 그를 “아빠”라고 부르며 따랐고, 그만큼 김씨도 학생들을 아꼈다.
▦ 김초원
2학년 3반 담임교사였던 김초원(당시 26)씨는 세월호 침몰 당시 가장 탈출하기 쉬웠던 5층 객실에 머물렀지만, 배가 기울자 곧장 4층으로 내려가 제자들의 구명조씨를 일일이 챙기고 겁먹지 않고 탈출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다독였다. 그날은 김씨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18일 새벽 주검으로 발견된 김씨는 제자들이 용돈을 모아 생일선물로 마련한 귀고리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김씨는 ‘기간제교사’라는 이유로 3년 째 순직인정을 받지 못했다.
▦ 남윤철
2학년 6반 담임이었던 남윤철(당시 35)씨는 급격히 기울어진 세월호에서 제자들에게 구명조끼를 챙겨주고, 끝까지 학생들의 대피를 도왔다. 배 안에 남은 학생들과 함께 비상구 쪽으로 향하다 실종돼 끝내 자신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학생들은 “남윤철 선생님이 구명조끼를 벗어 학생에게 줬다”고 증언했다. 남씨의 가족들은 “팽목항에서 아들이 끝까지 남아 아이들을 탈출구로 내보냈단 얘기를 전해 듣고 ‘윤철이답다’며 아들의 의로운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박육근
2학년 부장교사였던 박육근(당시 52)씨는 침몰 당시 학생들을 데리고 갑판 출입구로 올라왔다. 그러나 이내 “죽더라도 학생들을 살리고 내가 먼저 죽겠다”고 외치면서 다시 물이 가득한 선내로 들어갔다. 기우는 배 안에서 박씨는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는 방법을 지도했다. 박씨는 5월 5일 세월호 4층에서 구명조끼를 입은 채 학생들과 함께 발견됐다.
▦유니나
2학년1반 담임교사였던 유니나(당시 28)씨는 다른 교사들과 함께 학생들을 구하러 4층으로 내려갔다. 2학년1반은 10개 반 가운데 구조율이 가장 높았다. 유씨는 2012년 단원고를 첫 부임지로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2014년 마지막 부임지가 됐다. 임용 직후 담임을 맡았던 반 학생들에 따르면 유씨는 항상 제자들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는 이였고, 인생의 길잡이였다.
▦이지혜
2학년7반 담임교사였던 이지혜(당시 31)씨는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기간제교사였음에도 5년이나 단원고에서 근무했다. 이씨는 배가 기울자 4층 객실로 한달음에 달려가 우왕좌왕하는 제자들을 챙겼다. 목이 쉬도록 “갑판 위로 올라가”라고 소리지르던 것이 생존자들이 기억하는 이씨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씨는 ‘민간근로자’라는 이유로 인사혁신처에서 순직 인정을 거부당했다.
▦이해봉
2학년5반 담임교사였던 이해봉(당시 33)씨는 침몰 당시 난간에 매달린 학생 10여명을 구조했다. 그 해 2월부터 단원고에서 교편을 잡은 이씨는 첫 수업 때 자신의 이름이 바다 ‘해(海)’ 봉황 ‘봉(鳳)’이라며 ‘바다의 킹왕짱’이라는 농담으로 소개했다. 참사 후 제자 중 1명이 단원고 2학년 교무실 앞에 ‘왜 소식이 없나요, 빨리 돌아오세요’라고 적은 쪽지를 붙여뒀지만, 제자들을 보내고 기운 배에 갇힌 킹왕짱 선생님은 차가운 시신으로 뭍으로 돌아왔다.
▦ 전수영
2학년2반 담임교사였던 전수영(당시 25)씨는 세월호 침몰 34일만인 5월 19일, 3층 주방과 식당 사이 출입문 근처에서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채 발견됐다. 전씨가 있던 곳 가까이에서 일 하다 구조된 한 선사 직원은 “학생들을 다 올려 보내고 힘이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주저앉아 있던 여교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전씨의 어머니는 “그 날 수영이가 아침식사 당번이어서 혹시나 식당에 학생들이 남아있을 까봐 내려가 봤을 거에요”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최혜정
2학년9반 담임교사였던 최혜정(당시 24)씨는 배가 기울자 “너희들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다 갑판으로 올라가”라고 외쳤다. 학생들과 함께 하는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학생들을 안심시켰다. 최씨는 참사 당일 “조심히 올라와”라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끝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고창석
인솔교사였던 고창석(당시 40)씨는 미수습자다. 또 다른 인솔교사 양승진씨와 함께 5층 객실에 머물렀지만 기우는 배에 학생들을 두고 먼저 탈출할 수 없었다. “빨리 배에서 탈출하라”고 목놓아 외치던 게 생존자가 기억하는 고씨의 마지막 모습이다. 아내사랑이 끔찍했던 고씨가 세월호 참사 당일 아침 아내에게 남긴 ‘애들을 돌보느라 고생했다, 미안하다’는 짧은 메시지는 그의 유언이 됐다.
▦양승진
고씨와 함께 인솔교사로 세월호에 올랐던 양승진(당시 57)씨도 미수습자 신분으로 남아있다. 양씨는 배가 기울자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제자에게 벗어줬다. 4층 객실을 뛰어다니며 일일이 구명조끼를 챙기고 “탈출하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학교 뒤 텃밭에서 키운 채소로 김치를 담가 어려운 가정에 선물하자는 계획을 세웠던 양씨를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사진제공: 4ㆍ16 기억저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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