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산에서 태어났다. 주공아파트에 살았는데, 아마 평수는 열 평쯤 됐던 것 같고, 꽤 오래 연탄을 땠던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 직전까지 형과 좁은 방을 같이 썼는데, 책상을 둘 공간도 모자라 요를 깔고 자다 보면 어느새 책상과 의자 사이에 껴 있곤 했다. 화장실 문은 세탁기 배수관 때문에 닫히지 않았고, 변기 물은 안 내려가서 대야에 물을 받아다 내렸다.
유약한 성격에 몸은 왜소했고, 운동에는 젬병이었다. 소년에게 학교는 힘이 지배하는 정글이었고, 내겐 학교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나는 때때로 차라리 여자로 태어났다면 이렇게 폭력적인 위계가 일상이 되진 않았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젠 기억조차 어렴풋한 나의 유년기. 교복은 몸집이 커질까 싶어 크게 맞췄다가 졸업할 때까지도 몸에 맞지 않아 펑퍼짐했고, 어깨는 일진들의 시비에 주눅 들어 늘 구부정했다. 가정환경조사라며 나눠준 값싼 갱지에 부모 직업은 물론 학력까지 적어내야 했고, 상중하로 나뉜 생활수준 난의 ‘하’에 동그라미를 치며 민망해했다.
다들 그렇듯 유년의 경험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나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인권, 복지, 소수자 담론, 약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만나고 쓰며 그런 정체성은 더욱 공고해졌다. 생활수준에 점수를 매겨보라는 몰지각한 이들은 더 이상 없었지만, 혹 있었다면 난 어김없이 ‘하’를 골랐을 것이다. 나는 약자로서 강자들을 적대했다.
그녀를 만난 건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아니, 만났다는 말은 부적절할 것이다.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니까. 그녀는 나를 안다고 했다. 아마 학창 시절의 친구였으리라. 그녀는 가로등이 어두운 골목의 비좁은 다세대 주택에 살았고, 아직 미성년인 늦둥이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고 있었다. 여자란 이유로 어차피 곧 그만둘 것이란 취급을 받았고, 그럼에도 벌이는 그저 그랬다. 그녀는 이렇게 얘기했다. ‘너는 그 시절을 회상하지만, 나는 그 시절을 여전히 산다.’
그녀의 말은 깊은 곳을 울렸다. 자신을 약자로 인식하며 사회 정의가 어쩌고 하던 내가 부끄러웠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가 나를 갑자기 강자로 만든 것은 아니다. 30대 초반의 사회 초년생인 나는 여전히 대출에 얽매여 있다. 아직도 한 줄에 천 원인 시장표 김밥과 편의점 도시락이 익숙하다. 비혼을 이야기하는 나는 주위에서 비정상인 취급을 당한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의 헌신으로, 대학교까지 부족함이 없이 공부에 전념했다. 혼자 살기 나쁘지 않은 원룸 오피스텔에서 고양이와 뒹굴 대며 지낸다. 한때 차라리 여자로 태어났으면 했던 나는, 남성으로 태어난 덕분에 기성질서에 무리 없이 녹아 들었다.
이건 ‘너보다 더 불행한 사람도 있단다’ 따위의 질 낮은 위로의 메시지에 동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 쓴, 그리고 여기에 쓸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여전히 약자이며 소수자다. 그러나 또 많은 측면에서 중산층이라 할 만한 삶을 누리고 있고, 성별 등 여러 측면에선 기득권자이기까지 하다.
상위 일부의 부를 나누는 것만으로 사회정의가 구현될 수 있는 양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그보다 문제인 것이 중산층과 그 밑의 격차다. 그 격차는 점점 확대되고 있으며, 약자의 삶은 점점 위기에 몰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중산층 이상인 이들조차 다들 자신을 서민이라 말하고 약자라 말한다. 진짜 약자로부터는 눈을 돌리고 자신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만 토로하고 있다.
생활수준 ‘하’에 동그라미를 쳤던 소년은 이제 서른 아저씨가 되었고, 세상이 좀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게는 연대해야 할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있으며, 또한 돌려줘야 할 기득권이 있다. 무엇이 더 중하고 무엇이 더 나답다 할 것도 없다. 사실, 모두가 그렇다.
임예인 슬로우뉴스, ㅍㅍㅅㅅ 편집진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