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 고향에 광길이 아저씨라는 사람이 살았다. 쌍꺼풀 짙은 눈에 사시사철 취기 가득 차있던 한량. 내 아버지보다 여덟 살인가 어렸지만, 광길이 아저씨는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바둥대는 그 연배 남자들과 사뭇 다른 삶을 구가했다.
어려서 머리가 비상했다는 아저씨는 쉰여섯 가구가 사는 우리 동네 가가호호의 대소사를 뚜르르 꿰고 있었다. 우리 증조부 기일이 음력 사월 초사흘이라는 것도, 금니 양반네 손주 돌이 칠월 열이레라는 것도, 생기평 아주머니네 벌초 날이 돌아오는 주말로 잡혔다는 사실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아저씨는 이 집 저 집 바쁜 동네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비공인 동네 소식통을 자처했고, ‘한치 오차 없는 고급정보’를 적극 활용해 ‘취생몽사(醉生夢死)’라는 당신 생의 이상을 구현하고 있었다.
가만 보면 광길이 아저씨는 애경사가 든 집에 “안에 계시지유?” 한 마디 내뱉고는 거침없이 직진했다. 그렇게 사랑채든 마루턱이든 안방이든 자기 편한 곳에 자리잡은 뒤 “아, 형님, 오늘 동아일보에 나온 그 냥반 말인디유…,” 황소 같은 눈을 꿈벅이며 이야기 자락을 풀어놓기 시작할라 치면 안주인은 마지못해 술과 음식을 내주는 식이었다. 동네 어른들은 이 철딱서니 없는 남자가 쩝쩝 소리 내며 배불리 먹고 떠나기 무섭게 눈을 흘기고 혀를 찼다. “어찌 저리도 낯가죽이 두꺼울까?” “말해 입만 아프지. 제 집 초가지붕에 굼벵이가 들끓는 줄도 모르고 저리 쏘다니기만 하니, 원.” “아주 그냥 동네 생일상 제상 죄다 훑고 다님서 세상사 혼자 통달한 듯 육갑을 떤다니까.”
흉허물을 찾자면 어린 내가 아는 것만도 한 가마니가 넘었지만, 나는 광길이 아저씨가 싫지 않았다. 아저씨로 말하자면,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이야기 샘을 장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중국 고전, 특히 ‘삼국지’에 정통했다. 매해 겨울 밤 아저씨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삼국지’를 들려주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천칠백칠십년 전, 중국 탁현 거리를 배회하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 유비라….”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이야기는 미투리 삼는 유비와 푸줏간 주인 장비, 의로운 살인자 관우가 만나 복숭아밭에서 의형제 맺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도원결의(桃園結義), 삼고초려(三顧草廬), 사면초가(四面楚歌)…, 사자성어가 튀어나올 때면 아저씨는 허풍 가득 담은 말로 꼼꼼한 주석까지 곁들이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게 그렇게 좋았다. 특히 아저씨가 그려내는 도원결의 장면은 매번 내 상상력을 극대화했다. 흩날리는 복사꽃 아래 굳은 약속을 하는 장면이라. 낭만적이지 않은가? 언젠가 화창한 봄날, 나도 꼭 도원결의라는 걸 해야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그게 40여 년 전이다. 술지게미 냄새 풀풀 날리며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광길이 아저씨는 쉰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떴다. 함께 이야기 듣던 친구, 형제들도 그 시절을 인상 깊게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해마다 봄이 오면 내 마음이 아릿해지고 광길이 아저씨의 슬픈 듯 서늘한 눈빛과 목소리가 쟁쟁하게 떠올랐다.
어제 후배와 점심 먹고 선유도 공원을 산책하다 스무 그루 남짓 심긴 복숭아나무 밭에 이르렀다. 제때 맞은 연분홍 복사꽃 아래 앉아 기억 속 광길이 아저씨의 삶, 그 덕에 품게 된 오래된 소망을 이야기했다. 후배는 40년 넘게 간직해온 나의 위시리스트를 함께 실행할 벗이 되겠노라고 선뜻 나섰다. 어렵사리 도원결의할 벗을 구했건만 아뿔사! 맹약할 내용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음을 그제야 알았다. 유연한 후배가 대안을 냈다. 내년에 다시 오자고. 그러지 뭐. 광길이 아저씨 표현대로 ‘기분이 흥감해졌다.’ 내년 봄 선유도 공원 복사꽃이 필 때 우리는 근사한 도원결의를 할 것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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