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는 유난히 간지럼을 많이 탔다. 겨드랑이나 목덜미를 간질이면 견디기 어려웠다. 몸이 꽈배기처럼 오그라들었다. 간지럽기도 했거니와, 놀 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에 아이들끼리 서로 장난치는 행동이거나 어른들이 아이들을 골리는 친밀감의 표시이기도 했다.
귀이개가 슬금슬금 귓속을 헤집는 것도 간지럼 태우기 못지않은 자극이었다. 귓속을 들락거리는 “귀이개만 한 생쥐 한 마리”. 안도현 시인의 ‘귀 파는 날’을 읽으면 누구나 그런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이 시의 상황처럼 엄마나 누군가의 무릎에 머리를 맡기고 있었을 수도 있고, 스스로 조심조심 귓속을 팠던 경험일 수도 있다. 생쥐가 가려운 데를 찾아 구석구석 긁어 주어 시원하기도 하고, 날카로운 새가 연한 살을 콕 쪼아 찡그려지기도 한다. 귓속 동굴을 굴착해서 생쥐는 “한쪽 귀로 흘려 보낸/엄마의 잔소리”를 물고 나오고, “그 애가 내게 건넨 쪽지”를 몰래 펼쳐 볼 때 들렸던 사각거리는 소리도 꺼내 온다. 얼마만 한 덩어리의 ‘비밀’이 귓속에서 방출되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맡긴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간이다.
요즘은 ‘코를 판다’ ‘귀를 판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러다 보니 ‘코를 후비다’ ‘귀를 후비다’라는 표현은 거의 사라졌다. 땅을 파고 구덩이를 파는 것이지, 코나 귀를 파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 시의 제목을 ‘귀 후비는 날’이라고 했다면 좀 지저분한 느낌도 들었을 것이고, 또 딱히 ‘후비다’가 상황에 맞는 적실한 표현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시어(詩語)는 시어로서의 맛과 향과 품위를 추구하면 되는데, 우리의 습관적인 언어 사용이 어휘의 축소로 가는 경향은 경계할 일이다.
안도현 시인은 언제부턴가 동시 창작에 발을 들이더니 지난가을 세 번째 동시집 ‘기러기는 차갑다’를 냈다. 그는 전교조 해직 교사였고, ‘백석 평전’을 썼고, 특정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활동에도 앞장섰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길이 없는데, 그는 그 길을 꿋꿋이 갔다. 내가 아는 그는 목소리도 인상도 살결도 다 부드럽고 포근한데 말이다. 그를 내면에서 든든히 붙잡아 준 것은 동시를 향한 애정과 가슴에 깃들인 동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김이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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