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깨면 병아리 남이 깨면 후라이’
남에게 의지하다 달걀 프라이가 되느니 스스로 노력해서 병아리가 되자는 익살스런 문구가 교실 칠판 위에 자리 잡았다. 서울 이화여고 3학년 선반의 급훈이다. 이 학급 김지연(18)양은 “학급회의에서 나온 급훈 후보 중에서 투표를 통해 정했는데 뜬 구름 잡는 내용이 아니라 위트 있고 현실적이어서 반 친구들이나 선생님도 좋아했다. 멍하니 졸리거나 공부하기 싫을 때 ‘후라이는 안돼!’라고 생각하면 힘이 된다”라고 말했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톡톡 튀는 문구로 학생들의 생활 목표 또는 미래의 꿈을 표현한 급훈이 눈길을 끌고 있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라온 급훈 속엔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랩(Rap) 가사나 국정농단 패러디도 등장한다. 유인숙 서울교육청 장학관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급훈을 만들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민주적 절차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적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자유롭고 다양한 형태의 급훈이 시대상과 가치를 반영하며 진화하는 동안 학교 진입로 옆 바위에 새겨진 교훈은 화석처럼 굳어가고 있다. ‘성실 창조 협동’ ‘독학역행’ ‘굳세게 바르게 슬기롭게’처럼 뻔한 내용에 형식마저 사자성어나 구호 일색이다 보니 올바른 인간상을 확립하고 배움의 가치를 높인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교훈의 의미를 기억하는 학교 구성원은 많지 않다. 서울 B중학교 김(32)모 교사는 “학생이나 교사 중에 교훈을 모르는 경우가 꽤 많은데, 왠지 구시대적인 느낌이 들어 굳이 찾아서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학교라는 한 공간에서 존재하는 급훈과 교훈의 시차는 만드는 과정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학급 구성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정하는 급훈에 비해 교훈은 개교 당시 설립자 또는 국가의 교육 이념을 반영해 한 번 정하면 끝이다. 오랜 세월 수정이나 교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교훈에 담긴 가르침 역시 제정 당시에 머물러 있다. 그러다 보니 다양성과 창의력을 중시하는 21세기 교정에서 ‘근면’ ‘단결’ ‘애국’과 같은 고리타분한 덕목이 강조되고 있다. ‘부덕(婦德ㆍ부녀자로서 지녀야 할 덕목)’ 또는 ‘순결’ ‘착한 행실’ 등 다소곳한 여성상을 강요하는 듯한 유서 깊은 여고의 교훈에서도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읽기 어렵다.
교훈이 강조하는 덕목이 실제 교육행정에 반영되지 않고 사문화되고 있는 점도 문제다. 서울 S고 김(32)모 교사는 “교훈이 주는 메시지의 고리타분함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벽에 걸려만 있을 뿐 교육과정이나 학교 대소사를 기획하고 집행하는데 있어 교훈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건 문제”라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설립자의 뜻이 서려 있는 만큼 교훈을 바꾸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면서도 “다만, 학교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인식해 의견을 취합하고 토의를 통해 시대와 상황에 맞는 교훈을 새롭게 정한다면 문구 자체보다 더 중요한 교육적 가치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훈이 시대정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서 최근 설립된 학교 중엔 아예 교훈을 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2011년 개교한 서울 S고의 정(50)모 교사는 “해마다 구성원들이 바뀌는 학교에서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경구 하나를 정해 몇 십 년 이상을 끌고 가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아 만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데이터로 본 교훈
교훈에서 가장 흔한 덕목은 무엇일까. 서울시내 318개 고등학교 교훈에 쓰인 의미 있는 단어는 총 920개, 이를 키워드 별로 분류해 합산한 결과 가장 자주 등장한 단어는 ‘성실(8.1%)’이었다. ‘창조(7%)’와 ‘바른(6.4%)’ ‘배움(5.6%)’ ‘협동(5.6)’ ‘근면(5.2%)’이 그 뒤를 이었다.
남고와 여고가 각각 강조하는 덕목에도 차이가 있다. ‘근면’과 ‘협동’ ‘지성’ ‘씩씩함’ ‘의리’ 등을 앞세워 적극성을 강조한 남고에 비해 여고 교훈에는 ‘아름다움’ 또는 ‘사랑’ ‘착함’ ‘슬기’와 같이 여성스러움을 지향하는 덕목이 비교적 많았다.
개교 당시의 교육적 가치가 반영된 만큼 학교 설립 시기에 따라 교훈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선교사 또는 기독교 재단이 설립한 학교가 많았던 한일합방이전(1885년~1910년)에는 ‘사랑’과 ‘봉사’가 주를 이루었고, 일제강점기(1910년~1945년)에는 ‘지성(실력)’과 ‘성실’이 늘었다. ‘근면’과 ‘협동’이 눈에 띄게 증가한 것은 해방 이후 산업화 시기(1945년~1987년)이며 민주화(1987년) 이후 현재까지 자주 등장한 교훈은 ‘창조(창의)’였다. ‘꿈’과 ‘지혜(슬기)’도 이 시기 두각을 나타냈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그래픽=강준구기자 wldms4619@hankookilbo.com
권도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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