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시리아가 다시 국제이슈의 중심에 섰다.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은 맹독성 화학무기로 100명 가까운 제 나라 국민을 무참히 살육했다. 아사드 정권을 향한 공분은 한 장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배가됐다. 젊은 아버지는 사린가스를 마시고 스러진 쌍둥이를 두 팔로 안고 오열했다. 돌도 안 지난 갓난이들이었다. 그저 평온하게 잠든 듯한 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왜 숨져야 했는지 국제사회는 슬퍼하고 분노했다.
깊은 울림을 준 이미지의 힘이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슬픈 사진은 또 있다. 최근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홈페이지에 공습 피해 지역인 시리아 이들리브주 어린이들의 사진이 올라 왔다. 입에 검은색 테이프로 X자 표시를 한 아이들은 강대국 국기를 가슴에 달고 시위 중이었다. 친구들이 이렇게 죽어가는데 다른 나라들은 왜 침묵만 하고 있느냐는 무언의 절규였다. 만감이 교차했다. 어린 아이들까지 나서 비참한 처지를 고발해야 하는 현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이다. 거듭 자문(自問)했다. 이들은 제 발로 현장에 나온 것일까. 어린이를 ‘아이다움’이라는 테두리에 가두는 것일 수도 있으나 이런 타당한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마냥 울 수만은 없는, 약간의 불편한 감정이 밀려 왔다. 저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전쟁이라는 지독한 ‘리얼리즘’ 앞에서 아이들은 공포의 무게를 전달하는 맨 앞 자리에 서 있었다.
시리아 관련 뉴스는 대개 이런 식으로 소비됐다. 2015년 가족과 유럽으로 밀입국하려다 배가 난파돼 터키 해변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 지난해 시리아 제2의 도시 알레포에서 가까스로 구조된 뒤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카메라를 응시하던 5세 소년 옴란 다크니시의 무표정한 얼굴. 이 정도 이미지를 마주하고 나서야 여론은 “내 탓이오”를 외치며 들썩였다.
시리아 내전을 통해 ‘포토저널리즘’은 만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 시사주간 타임은 “시리아에서만큼 사진의 영향력이 발휘된 적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쿠르디 사건 이후 유럽 국가들의 난민정책이 일부 개선되기는 했지만 이슬람 혐오 목소리도 몇 배로 커졌다. 살인 집단 이슬람국가(IS)는 정부기능이 마비된 시리아에 똬리를 틀고 명실상부한 글로벌 테러 지휘부로 거듭났다.
감정의 농도는 자극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감정의 날은 무뎌지고, 애틋함을 유지하려 보다 ‘잘 팔리는’ 아이들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미국의 저명 작가 수전 손택은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연민은 쉽사리 무능력함뿐 아니라 무고함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된다”고 했다. 사태 해결을 위한 구체적 실천 없이 함부로 시리아 국민의 고통을 이해하는 척하면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지 말라는 얘기다.
우리는 흔히 이미지를 소비만 해도 피사체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시리아 사태도 마찬가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퍼진 처참한 사진 한 장을 공유하면서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한 것 같은 우쭐함을 느끼지는 않았는가. 하지만 사진을 퍼 나르고 댓글만 달아서는 살육의 악순환을 멈출 수 없다. 연민이 시들해지면 시리아의 고통은 금세 또 잊혀질 것이다. 2011년 3월 민주화 요구로 시작된 반정부 시위가 국제 대리전으로 확대돼 개인의 존엄을 말살한 지난 6년처럼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공유하기’밖에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무력감을 떨쳐내고, 손택의 지적처럼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얼마나 더 섬뜩한 사진이 헤드라인을 장식해야 시리아의 비극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나에게, 당신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김이삭 국제부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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