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4.13
조각가이자 시인ㆍ극작가로, 1959년 출간한 장편소설 ‘양철북’ 을 시작으로 잇달아 발표한 2차 대전 ‘단치히 3부작’의 작가이자 반핵 평화운동가로, 마침내 99년 노벨 문학상의 작가로 생의 절정에 섰던 귄터 그라스가 79세이던 2006년 자서전 3부작의 첫 권 ‘양파 껍질 벗기기(Beim Hauten der Zwiebel)’를 출간했다. 거기서 그는 2차 대전 중이던 44년 나치 무장 친위대(Waffen-SS)에 자원해 복무한 사실을 고백했다. “(전후 62년에 이르는) 그 긴 세월 동안 나의 침묵은 스스로에게 큰 짐이었고, 그것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이제 그 짐을 내려놓을 때가 됐다.”
그의 고백에 세상은 크게 놀랐다. 인권 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정의의 편에 섰던 세계적 작가의 “오랜 위선”에 분노한 이들도 있었고, 비록 늦긴 했지만 용기 있는 고백에 박수를 보낸 이들도 있었다. 전후 자신의 나치 전력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반성함으로써 과거사에 대한 집단적 자성에 일조했던 몇몇 이들에 비해 그는 비겁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치 당과 제3제국, 전시 시민 일반의 책임 뒤에 숨어 자신의 치부를 감춰 온 더 많은 이들에 비해 그는 용감했다. 그는 특별히 명예로웠던 만큼 잃을 것도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의 폴란드 그단스크(옛 단치히 자유시)의 한 완고한 하층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귄터 그라스는 16살이던 43년 ‘제국노동대’에 징집됐다. 유년의 억압적이던 집안 분위기만큼 강제노동이 싫었던 그는 17살 생일이 갓 지난 44년 11월 나치 해군 잠수함병으로 자원했다가 거부당했고, 차선으로 택한 게 나치 친위대였다. 나치당의 사조직인 SS친위대는 자원자 가운데 혈통 등을 엄격히 따져 충원한 엘리트 조직이었지만. 전쟁 후반부 조직원 충원에 애를 먹으면서 자격 기준도 대폭 느슨해졌다. 그라스가 소속됐던 SS기갑사단이 인종학살에 가담하지 않은 부대였다는 점도 물론 그라스가 용기를 내게 된 배경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쯤 되는 이조차 그 결심을 하는 데 62년이나 걸렸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는 SS친위대 경력 때문에 ‘반유대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말년까지 이스라엘의 아랍 박해를 누구보다 강경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비판했다. 귄터 그라스가 2015년 4월 13일 별세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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