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규모의 경제 효과가 통하는 시장이 아니다. 독일 약 1,300개, 미국 약 4,000개. 소위 맥주 선진국에는 중소규모 맥주기업이 넘쳐난다.
대량생산 맥주보다 다품종 소량생산 맥주에 주목하는 것은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일명 맥덕, 맥주 덕후(마니아)들이 지역적 특성을 살린 ‘토종 맥주’를 일구며 활동반경을 넓혀온 까닭에 수제맥주 문화는 더 이상 경리단길을 중심으로 한 이태원 문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서울과 수도권을 넘어 각 지역에서 수제맥주 강자로 부상하고 있는 양조장을 찾아가 물었다. “맥주는 어떻게 당신 인생의 일부가 되었는가.”
‘맥주는 왜 한국술이 될 수 없나’…전은경 강릉 버드나무 브루어리 대표
강원 강릉시 홍제동 버드나무 브루어리는 강릉의 한국적 재료로 맥주를 만드는 곳이다.
전통주 칼럼을 쓰던 프리랜서 작가 출신 전은경(31) 대표가 폐업한 강릉탁주 양조장을 리모델링해 2015년 문을 열었다. 전 대표는 “동네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술도가라는 과거 공간을 현대인의 기호를 반영한 크래프트 비어로 재해석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버드나무 브루어리에는 90년 시간을 간직한 막걸리 발효조와 나무기둥, 현대식 맥주 설비가 공존, 과거와 현재를 모두 보여준다.
전 대표는 옛 탁주공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곳에서 소나무로 대표되는 강릉을 상징하듯 송순을 가미한 맥주와 창포맥주, 강릉시 사천면에서 생산되는 미노리 쌀로 만든 ‘미노리 세션’ 등을 만든다. 밀맥주 ‘즈므블랑’은 ‘해가 지는 마을’이란 의미를 지닌 강릉사투리 ‘즈므 마을’에서 이름을 따 왔다. 동해안 대표 어종인 오징어 먹물 도우와 제철 해산물이 듬뿍 담긴 ‘주문진 피자’ 등 안주류에도 강릉의 색을 입혔다.
전 대표는 “여전히 외국 문화로 여겨지는 맥주를 한국적 시각에서 다시 해석하는 게 버드나무 브루어리의 지향점”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버드나무 브루어리를 찾는 발길이 전국에서 이어져 커피에 이어 수제맥주가 강릉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게 지역민들의 전언이다.
전 대표는 “현재 국내 수제맥주 점유율은 전체 맥주시장의 1% 수준에 불과하다”며 “앞으로 10% 수준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크래프트비어 시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미국의 경우에 비춰 추정한 것”이라며 “소규모 제조 업체에 대한 정부 규제 완화와 다품종 소량생산을 통해 품질 좋은 맥주를 만들자는 제조자들의 장인정신이 뒷받침돼야 시장 확대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유학 시절 외로움 달래 주던 맥주…윤용집ㆍ이미혜 아산 브루어리304 대표
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암리의 ‘브루어리 304’를 운영하는 윤용집(52)씨와 이미혜(48)씨 부부의 이력은 맥주와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인다. 부부는 하버드대 건축공학 석ㆍ박사 출신이다. 유학을 마친 윤대표는 귀국 후 단국대 교수로 10년간 재직했다. 부인 이대표 역시 서울에서 건축인테리어 사업을 했다. 미국 유학 시절 마셔 본 에일 맥주 맛을 잊을 수 없었던 부부는 직접 양조장까지 차리게 됐다.
윤 대표는 박사 학위를 딴 후 2014년 부친이 운영하던 범한정수를 물려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맥주 생산에 나서게 됐다. 범한정수는 반도체 세척용 초순수물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유학 시절 외로움을 달래 준 수제맥주를 추억하던 그는 가업의 자랑인 정수능력을 맥주생산에 접목하면 국내 수제맥주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남편만큼 맥주를 좋아하던 아내도 건축인테리어 사업을 접고 합류했다.
본격적인 수제맥주 생산을 위해 그들은 캐나다 맥주공장을 견학하고 발효조 등 탱크 5대를 들여와 범한정수 1층에 양조장을 시설했다. 영국의 에일 맥주 전문가를 불러 한달 5톤 생산규모의 장비를 설치했다. 국내 수제맥주의 메카 이태원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양조사 민성준(28)씨도 영입했다. 계절에 적합한 신제품개발과 브루어리 304만의 개성 있는 맥주생산을 위해 이재성(28) 양조사도 영입했다. 브루어리304는 명왕성을 뜻하는 ‘플루토(Pluto)’를 브랜드로, 맛과 색깔을 달리한 ‘블론드’ ‘스타우트’ ‘패일’등 3종의 에일 맥주를 생산한다.
부부는 수제맥주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아산과 천안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매주 양조 강좌를 열고 있다. 과거 마을마다 있던 막걸리 양조장 문화를 살려 수제맥주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서다. 덕분에 요즘 맥주를 사러 오는 동네주민들이 부쩍 늘었다.
이 대표는 “외국처럼 오랜 세월 마을주민과 함께하는 양조장을 만들고 싶다”며 “수제맥주 공부방을 지역주민의 사랑방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호기심이 어느새 본업으로…김판열 부산 아키투브루잉 대표
부산 기장군의 한적한 마을에는 ‘도깨비’가 있다. 도깨비는 도깨빈데, 드라마도 놀이동산 귀신의 집도 아닌 메주의 미생물로 만든 수제맥주의 이름이다. 김판열(51) 아키투브루잉 대표는 “우리 고유의 미생물로 만든 맥주”라며 “장난스럽고 다양한 이미지를 주려고 도깨비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말했다. 사우어(sour) 맥주로 첫 맛은 부드러우면서도 뒷맛은 강한 신맛이 일품인 도깨비는 김 대표의 야심작이다.
김 대표는 홈브루잉 1세대로 본업과 병행하다 수제맥주 양조장까지 만들었다. 본업이 뒤바뀐 것이다. 특허법률사무소에 다녔던 그는 2003년 우연히 본 TV에서 자가맥주를 접하고 ‘아차’ 싶었단다. 당시 맥주공방으로 변한 그의 집 베란다는 수제맥주 40~50병으로 가득 찰 정도였다. 급기야 이공계 출신의 전공지식을 발휘해 히터, 온도제어기, 순환펌프 등을 갖춘 홈브루잉 기계를 직접 설계, 제작할 정도로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는 맥주덕후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유명 포털사이트 카페 ‘맥주만들기 동호회(맥만동)’에 수제맥주와 홈브루잉 기계 제작기를 올리는 등 그의 게시물은 400개가 넘는다. 김 대표는 “카페 닉네임이 피셔(fisher)여서 맥만동 피셔라고 하면 맥덕 가운데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호기심은 어느새 본업이 됐다. 2013년 맥주공방을 만들어 법률사무소 일과 병행하다 이듬해 부산 기장군에 브루어리(양조장)을 만들어 본격적인 수제맥주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됐다. 아키투브루잉의 맥주 레시피의 90% 가량이 과거 맥주공방에서 나온 것이다. 김 대표는 “언젠가 양조장을 세우겠다는 목표가 있었다”며 “맥주를 마시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공부를 제대로 해서 하나의 창업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릉=박은성 기자 esp7@hankookilbo.com
아산=이준호 기자 junhol@hankookilbo.com
부산=정치섭 기자 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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