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미ㆍ중 간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시진핑을 만찬회장으로 초대한 트럼프는 만찬 도중에야 넌지시 미군의 시리아 폭격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제스처를 두고 미국이 중국에 대해 자국의 힘을 과시하고 무언의 경고를 보낸 것이라고도 해석한다. 진의야 무엇이든, 트럼프의 짐짓 으스대는 광경은 일반인인 나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것이 협상 목적의 기 싸움이든, 평소의 생활 습관이든, 들숨과 날숨을 내쉬듯이 ‘센 척, 잘난 척’ 하는 서양 사람들을 그간 살면서 많이 봐 와서이다.
나도 한때는 서양 친구들의 공격적인 자기 표현이 당당함으로 여겨졌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나도 모르게 비슷한 태도를 체화했다. 주로 ‘갑질하는’ 시니어들에 의해 겸손함을 ‘강요당하는’ 한국 문화에 비하면, 서양 문화에는 자유로운 자기 표현과 당당함의 미덕이 있다. 그 미덕의 다른 측면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나이가 들어 오랜 마음의 고향이었던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주관적으로 봤을 때 그다지 똑똑하지도 않은 서양 동료들이 자기 확신에 도취되어 현란한 수사를 구사할 때, 정작 알맹이가 되어야 할 근거나 엄밀한 사고는 빈약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사회과학에는 여러 이슈에 대해 이미 많은 관점과 개념들이 정립되어 있다 보니, 자기 주장이 차용된 언어의 모래성 위에 무책임하게 쌓이는 경우가 더 빈번했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점점 의문이 들었다. 주니어이든 대가이든 간에, ‘자기 자신을 위한 겸손함의 브레이크가 완전히 풀려버린, 저런 단정적이고 자기 도취적인 태도가 제대로 성숙한 인격체의 모습일까?” 하는.
언젠가 읽었던 데이비드 브룩스의 <인간의 품격>(김희정 역)은 내 오랜 의문에 대해 한가지 이해의 실마리를 주었다. 책 서문에는 2차 세계대전에서 막 승리한 후, 프랭크 시나트라 등 미국의 유명인들이 대중 앞에 나와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간신히 거둔 승리에 대해 감사하면서, 구성원으로서 앞으로의 책무에 대해 두려워하며 숙고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저자는 이런 조신한 자아성찰적 태도가 작금의 미국 사회에는 완전히 잊혀진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고 지적한다. 반세기 전에는 미국에서 겸손이 매우 중요한 미덕이었고, 타자 앞에서 대놓고 잘난 척하는 듯한 태도가 사회적으로 무거운 제재를 받았다는 것이다. 1999년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도 어머니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태도와 허황된 주장으로만 가득 찬 십대 딸을 야단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때는 모든 것을 당연한 듯이 누리기만 하면서 그렇게 버릇없이 크지 않았다면서.
트럼프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성공을 지향하는 에고로 가득 찬 채 언행이 참으로 ‘버릇없던’ 일부 서양 동료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아카데미도 그러했고, 현재의 비즈니스 필드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갈수록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가는 서양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필자는 동양의 전통적 규범이 현대의 서양인이나 아시아인에게 갈수록 초라해지는 인간의 품격을 갖추기 위한 적합한 지침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현재 우리 삶을 직시하고 관통하는 보다 깊은 성찰과 실천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10대를 영국에서 보내면서, “너희는 아직도 그런 독재적인 관습이 있니?”, “너희 같은 나라는 어린 여공들이 착취당하면서 일한다며?” 하는 식의 비아냥을 들었다. 그때 난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면서 잘못된 것을 넘어서기 위해 아시아인들이 분투하고 있고, 언젠가는 나 또한 그러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의연한 인간의 성장을 위해서는, 여전히 훨씬 더 많은 분투가 필요한 것 같다. 이곳에서, 인간으로서 제대로 분투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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