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보호단체가 주최한 강연에 갔다. 지난 겨울 조류독감으로 3,000만 마리가 넘는 동물이 살처분 된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는데 내내 답답함이 묻어났다. 한 참석자는 상식적이라고 생각했던 지인이 부활절 달걀 값이 너무 비싸다고 걱정하는 모습에 분노했다. 자신은 수많은 생명이 속절없이 매장되는 모습을 지켜본 지난겨울이 끔찍했는데 세상은 변한 게 없는 것 같으니 그럴 것이다.
얼마 전 환경단체 활동가를 만나서 설악산에 추진하려던 오색 케이블카 사업이 부결되던 날 분위기가 어땠는지 물었다. 4대강 사업부터 올림픽으로 수백 년 된 가리왕산의 나무 수 만 그루가 베어지는 등 근 10년 동안 환경 파괴적인 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보았을 텐데 오랜만의 승리에 현장이 얼마나 축제 분위기였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사업이 부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이제 서울로 올라가자며 덤덤하게 짐을 정리했다고. 그러다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야 비로소 승리를 실감하고 기쁨을 만끽했다고. 그 이야기를 듣는데 왜 이리 짠한지. 그간 잦은 패배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질 걸 알면서 시작하는 싸움은 얼마나 힘든가. 승리의 경험이 많이 부족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진행된 광장에서의 승리의 경험이 그래서 소중하다. 현직 대통령의 탄핵을 이뤄냈고, 광장에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했다는 자긍심을 얻었다. 분노하는 마음으로 추운 겨울 광장에 앉았지만 같은 마음의 사람들을 보며 안도했고 이 사람들과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도 얻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경험은 얼마나 중요한가. 지향하는 세상이 있다면 전진은 중요하다.
동물 분야는 좀처럼 승리의 기쁨이 없었다. 미진한 사회 제도, 전반적으로 낮은 생명의식,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동물학대 사건, 동물 전염병으로 인한 살처분은 거의 매해 벌어진다. 첫 대량 살처분이 일어났던 2010년의 겨울 이후 거의 매년 살처분이 반복되다 보니 충격이 줄어드는 것 같다. 무섭지만 무뎌진 달까.
동물보호운동 진영의 패배는 1992년 세계 최초로 동물의 존엄성을 헌법에 명시한 스위스에서도 일어난다. 헌법 덕분에 스위스에서 동물은 동물보호법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동료 생명체로서 본연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다. ‘동물들의 소송’의 저자 안토니 괴첼은 취리히 주의 형사소송 관련 동물복지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렇다. 스위스는 각 지역마다 동물 변호사를 둔 나라였다. 그런데 2010년 20년간 지속된 동물 변호사 제도가 사라졌다. 저자는 재직하는 동안 맡았던 700여 건의 소송에서 대부분 승소했다는데 정작 중요한 승부에서 패배했다. 사회를 변혁하는 싸움은 길고, 승리와 패배는 번갈아 찾아온다.
지난 달 중요한 동물학대 관련 재판 결과가 있었다. 식용견을 기르는 개 농장에서 목을 매다는 방법으로 개를 도살했던 사람들에게 징역 4개월, 집행유예 1년이 선고된 것이다. 처음 뉴스를 접하고는 “그럼 그렇지, 또 집행유예네”하고 실망했다. 그런데 동물단체의 소식지를 보고 실망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간 개 농장의 동물학대는 인정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징역형이 적용됐으니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으로 해석하는 단체의 긍정성에 피식 웃었다.
제주에서는 달리는 오토바이에 매달려있던 백구가 처참하게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잊을만하면 벌어지는 같은 유형의 사건이다. 백구는 식용으로 쓰이기 위해 도살장으로 가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관련법이 한심해서 먹기 위해 자신의 개를 죽이는 것은 처벌하지 못하더라도 살아있는 동물에게 공포와 고통을 주는 행위는 분명 불법인데 중요한 건 담당 경찰서가 동물보호법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지겹게 반복되는 일이다. 이러니 동물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자꾸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고 패배주의에 빠진다.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이 힘을 모으면 세상이 바뀔 거라는 기대감을 갖고 뿌듯한 마음으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처럼 동물보호 진영도 작은 승리를 경험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변화를 이끄는 힘인 관심과 행동이 필요하다. 일단 백구 학대자를 강력하게 처벌하라는 서명부터 하고, 달걀 값을 걱정할 게 아니라 부활절 달걀의 본래 의미를 되새기는 부활절이 되자고 설득하고 다녀야겠다.
김보경 책공장더불어 대표
참고한 책: ‘동물들의 소송’, 안토니 괴첼,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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