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제주는 들썩거리는 봄 기운으로 1년 중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 왕벚꽃축제와 더불어 유채꽃축제 등 각종 봄 축제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기간 제주 들녘은 봄꽃으로 뒤덮이고, 싱그러운 보리밭까지 어우러지며 장관을 연출한다.
즐거운 축제와는 반대로 제주의 아픔을 함께하려는 추모의 발길도 도내 곳곳에서 이어진다.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 죽임을 당한 제주4.3사건 현장을 찾는 다크투어(역사교훈여행)가 그것이다. 4.3평화공원을 비롯해 성산일출봉, 정방폭포, 함덕해수욕장, 표선해수욕장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그 중에서 특히 제주국제공항은 대표적인 학살 터다. 제주국제공항의 시작은 ‘정뜨르비행장’이다. 넓은 들 한가운데 우물이 있다고 해서 우물 정(井)과 들판을 의미하는 ‘드르’가 합쳐진 말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2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해 1944년 5월 준공한 일본 육군의 비행장이다.
4.3사건 당시 정뜨르비행장에서는 1948년 12월 말부터 인근 지역 주민들을 끌어다 학살한 것을 시작으로 1949년 2월에는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던 화북 등지의 주민 76명이 토벌대에 의해 학살, 1949년 10월에는 249명의 군법사형수들이 총살됐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에는 제주시와 서귀포지역 예비검속자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이어졌다. 제주경찰서와 주정공장에 갇혀 있던 주민들은 트럭에 실려 공항에 와서 총살됐다. 증언에 따르면 트럭 10대에 실린 희생자 수는 약 500명 정도다.
이처럼 많은 학살이 자행됐음에도 다른 지역과 달리 희생자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공항’이라는 특성상 민간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고, 학살 이후 제주국제공항이 4차에 걸쳐 확장되면서 정확한 장소를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이곳에 대한 유해 발굴작업이 진행된 것은 2003년 故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한지 4년이나 흐른 2007년 8월부터 2009년 6월까지였다. 두 차례에 걸쳐 유해발굴이 진행됐으며 장소는 남북활주로 북서쪽 지점과 북동쪽 지점이다.
1차 발굴에서는 유골이 온전한 유해 54구를 비롯해 일부만 남은 유골 1000여 점, 유류품 659점이 수습됐다. 완전 유해의 경우 하나같이 두 손이 뒤로 묶여 엎어진 상태였는데, 이는 구덩이 앞에서 총살당한 후 그 위에 흙을 덮었음을 보여준다. 발견된 유류품으로는 칼빈소총을 비롯해 M1소총의 탄두와 탄피, 안경, 금보철, 단추, 버클, 빗, 신발 등으로 특히 실명이 새겨진 도색도 있었다.
수습된 유해를 감식한 결과 123개체가 확인됐는데, 이를 바탕으로 유가족 채혈을 통한 유전자 감식 결과 21구의 신원을 확인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자 유해발굴을 통한 신원확인이라는 최초의 사례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옛 서귀포경찰서와 모슬포경찰서에 수감됐던 이들로 서귀포경찰서의 경우 그간 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2차 발굴에서는 한 구덩이에서 완전 유해 259구를 수습한 것을 비롯해 유류품 1,311점이 나왔다. 1949년 10월의 군법사형수 249명보다 많은 숫자다. 감식결과 260개체가 확인됐는데 이들 중 48구의 신원이 확인됐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유가족들에게 개별 통보되었고 나머지는 4.3평화공원에 안치돼 있다.
그 외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경우, 후손들은 ‘헛묘’를 만들어 조상을 모시는 경우가 많다. 시신이 없기에 혼만 모셔와 봉분을 쌓는 것이다. 바다에 수장되거나 정방폭포 앞에서 희생돼 바다로 떠내려간 경우, 육지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한국전쟁 와중에 행방불명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제주공항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속적으로 유해발굴을 진행해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후손들에게 인계할 경우 이제껏 한을 안고 살아온 후손들에게는 큰 위안이 될 것이다. 또한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4.3사건의 실체를 하나하나 밝혀가는 주춧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제주공항을 끝으로 현재까지 더 이상의 유해 발굴 작업은 진행되지 않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서 더 이상 예산이 배정되지 않은 탓이다.
제주국제공항은 제주를 찾는 첫 관문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매일같이 수많은 비행기들이 제주공항 활주로에서 뜨고 내린다. 그 밑에 이러한 아픔이 있는지도 모른 채.
김수열 시인은 정뜨르비행장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하루에도 수백의 시조새들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할퀴며 차오르고/ 찢어지는 굉음으로 바닥 짓누르며 내려앉는다/ 차오르고 내려앉을 때마다/ 뼈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 빠직 빠직 빠지지지직/ 빠직 빠직 빠지지지직’
강정효 ㈔제주민예총 이사장 hallasan19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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