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삶을 바꾸는 순간이 있습니다. 유명 문화계 인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의 인생에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남긴 작품 또는 예술인을 소개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데뷔’ 무대는 1973년,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KBS교향악단의 전신인 국립교향악단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1985년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개최된 제6회 로베르 카사드쉬 국제 피아노 콩쿠르(현 클리브랜드 국제 콩쿠르)에서 1위에 입상했을 때에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쳤다. 생각해보니 그에 앞서 줄리어드 음대 입학 시험을 치를 때도 ‘열정’ 소나타(소나타 23번)가 있었다. 21세기가 시작된 2000년, 밀레니엄을 맞이해 인간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려는 취지의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협주곡 전곡(5곡)을 하루에 연주했다. 2008년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된 후 처음 시작한 프로젝트가 베토벤 교향곡 전곡(9곡) 연주였다. 오랜만에 피아니스트로서 무대에 선 지난해에는 ‘템페스트(소나타 17번)’, ‘고별(소나타 26번)’, ‘월광(소나타 14번)’, ‘열정’을 연주했다.
열거해 보니 정말 많이 연주했구나 싶다. 내가 가르쳤던 김선욱과 문지영도 콩쿠르에서 베토벤을 연주하는 걸 보면 학생들에게도 전해지나 싶기도 하다. 스스로 베토벤 전문가라거나, 다른 작곡가보다 베토벤을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예술적 의미를 두는 중요한 연주에서는 항상 베토벤을 찾게 됐다.
베토벤의 음악을 음반으로 직접 들어본 건 중학교 1학년이 돼서였다.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아버지는 LP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당시 집에 있던 LP가 2,000장이 넘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LP를 빌리러 집에 왔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1학년 때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LP가 생겼다. 그 곡이 왜 그렇게 좋았었는지, 지금 돌이켜 설명하긴 어렵지만 말 그대로 하루 종일 들었다. 이웃집에서 밤에 시끄럽다는 항의가 들어와 헤드폰이라는 걸 처음 사기도 했다. 몇 날 며칠 밤을 꼴딱 새워 들었고, 결국엔 LP판에 흠집이 생겨 아버지에게 혼이 났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협주곡 3번은 베토벤의 제2기를 알려주는 음악사적으로도 중요한 곡이었다. 낭만주의로 들어간 것으로도 보이는 이 곡의 서정성과 감미로움에 반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생애 가장 뼈아픈 기억에도 베토벤이 있다. 1979년 1위로 입상했던 동아 콩쿠르 2차 예선 때였다. 소나타 13번 연주를 정확하게 기억한다. 당시 나의 스승은 그 연주가 ‘축축 처졌다’고 혹평했다. 어찌나 화를 내시는지, 그 후 본선을 위한 레슨을 받으러 갔을 때는 악보를 집어 던지실 정도였다. 스승으로부터 가장 심한 꾸지람을 얻게 한 것도 베토벤이었다. 당시의 아픈 기억으로 그 이후론 연주를 잘 하지 않게 된 곡이기도 하다.
널리 알려져 있듯 베토벤은 이미 20대에 점차 청력을 잃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베토벤이 역경을 딛고 일어나 위대한 곡을 작곡해 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위안을 얻고 그를 닮고 싶어한다. 그의 음악에서 우리는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다는 동질감을 느낀다.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을 거치면 종국에는 작품 끝에 ‘승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음악 자체에도 그가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담겨 있기에 베토벤은 ‘사상가’라고 불린다.
베토벤은 그 누구보다 연주자를 성장하게 하는 작곡가이기도 하다. “베토벤의 포르테는 진짜 포르테고 베토벤의 피아노는 진짜 피아노”라는 말이 있다. 악보에 써 있는 악상기호들이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다. 베토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작곡가들이 악보에 악상기호를 구체적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더 그렇다. 베토벤은 작곡가일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 엄청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자신의 곡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장이 뚜렷했다. 베토벤의 자필 악보를 보면 지우고 다시 쓴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최대한 구체화하고 완벽을 추구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그의 자필 악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꼭 보라고 강조한다. 그의 생각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연주자들의 의무는 그의 악보가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고 나만의 소리로 연주해 내는 것일 테다. ‘열정’ 소나타를 연주하던 도중 스포르찬도(sfㆍ특히 세게)가 왜 그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베토벤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어 그가 살아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 동안 많이 했다.
베토벤을 만나지 않는 이상 그 의미는 찾을 수 없고,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게 정답이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흘러가 버리고, 당연하다고 느끼는 게 많은 요즘 베토벤 악보를 보면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순간은 음악인들에게는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옛날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 같긴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좀 더 알게 해주는 스승이 되고자 한다. 졸업하던 학생이 “난 이 세상에서 선생님이 제일 무서운데 그 이유는 내 자신에 대해 내가 아는 것보다 선생님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는 말을 나에게 남긴 적이 있다. 그런 면에서 베토벤보다 더 큰 스승은 없다. 베토벤의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연주자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베토벤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긴 곡들을 통해 자신만의 소리를 찾게 된다.
지휘자가 된 이후에는 이런 점이 더 크게 느껴졌다. 베토벤의 교향곡은 거대한 건축물에 비유할 수 있다. 그 건축물을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입자 중 하나만 빠져도 건물은 무너진다. 그 만큼 치밀한 계획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고 연주하기도 힘들다. 오케스트라의 수많은 사람 중 몇 명이라도 빠진다면 곡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 베토벤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작곡가는 없다고, ‘숨을 곳이 없다’는 표현도 쓴다. 말러의 교향곡만 보더라도 부각할 부분을 확실하게 강조한다는 건, 다시 말하면 일부는 숨을 여지가 있다는 뜻이 된다. 반면 베토벤의 곡은 모두의 소리가 들리고 보일 수밖에 없다. 베토벤을 통해 단련된 연주자와 오케스트라는 어떤 곡을 연주해도 무대에서 흔들림 없는 연주력을 보여줄 수 있게 된다고 믿는 이유다. 피아노 콩쿠르마다 베토벤 소나타가 꼭 포함돼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피아니스트로서 베토벤의 모든 곡을 배우려고 노력은 했지만 전부 다 배우지는 못했다. 소나타 32곡 뿐만 아니라 잘 연주되지 않는 작품들도 굉장히 많다.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나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를 이뤄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듯, 앞으로도 중요한 순간 마다 그의 곡을 연주해나갈 것이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ㆍ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의 말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리=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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