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 축구의 미래가 걸렸다는 각오로 뛰었다.”
여자축구대표팀 선수들이 역사적인 평양 원정에서 소중한 무승부를 챙긴 뒤 이같이 말했다.
윤덕여(56)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7일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2018년 요르단 여자 아시안컵 예선 B조 북한과 2차전에서 1-1로 비겼다.
한국은 전반 5분 페널티킥을 내주며 위기를 맞았지만 베테랑 골키퍼 김정미(33ㆍ현대제철)의 선방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페널티킥을 막은 김정미가 달려든 북한 선수와 부딪혀 쓰러지자 양 팀 선수들이 일제히 몰려들어 거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은 전반 추가시간 상대 승향심에게 선제골을 내줬지만 후반 30분 장슬기(23ㆍ현대제철)가 천금 같은 동점골을 터뜨렸다. 이후 후반 추가시간이 7분이나 주어졌다. 하지만 경기 전 “죽고 나오자”라고 외쳤던 한국 선수들은 다리에 쥐가 나고 부상으로 쓰러지면서도 투혼을 불살랐다. 정설빈(27ㆍ현대제철)은 왼팔을 다쳐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뛰고 또 뛰었고 결국 1-1 스코어를 지켜냈다.
이번 무승부가 주는 의미는 크다.
북한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0위로 한국(17위)보다 높다. 작년 U-17, U-20 월드컵을 잇달아 석권한 세계 최강 팀이다. 역대 전적에서도 한국이 1승3무14패로 크게 열세였다.
이번 대회에서는 남북을 비롯해 인도, 우즈베키스탄, 홍콩 등 5팀이 풀 리그를 펼쳐 1위만 본선에 나간다. 한국과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3팀의 기량이 한참 아래라 이날 맞대결이 사실상 결승이었다. 아시안컵 본선이 여자월드컵 예선을 겸하기 때문에 이번에 1위를 못하면 2019년 프랑스 여자월드컵 진출도 좌절된다. 대표팀 선수들이 무승부로 경기를 끝낸 뒤 ‘여자 축구의 미래’를 언급한 건 이 때문이다. 경기 뒤 한국 선수들은 얼싸안으며 만족해한 반면 북한은 다소 침통한 표정이었다.
인도(8-0), 홍콩(5-0), 한국(1-1)을 상대로 2승1무를 기록 중인 북한은 9일 우즈베키스탄과 최종전을 앞두고 있다. 인도를 10-0으로 대파하고 북한과 비긴 한국은 9일 홍콩, 11일 우즈베키스탄을 상대한다. 남은 경기에서 얼마나 더 많은 골을 넣느냐가 중요하다. 한국이 경기를 다 마친 북한의 골득실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11일 최종전을 치른다는 건 행운이다.
‘북한 축구의 성지’ 김일성 경기장은 5만 명으로 가득 찼다. 최룡해 국가체육지도위원장도 보였다. 태극기에 이어 북한 국기가 등장하고 북한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관중들은 모두 기립해 북을 치고 황금색 종이나팔을 불었다. 5만 관중이 북한 국가를 합창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엄청난 응원 물결에 외신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관중들은 북한이 공을 잡으면 환호하고 한국 공격 때는 여지없이 야유를 보냈다. “잘한다” “본때를 보여라” 등 응원구호와 짝짝이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북한이 전반 5분 페널티킥을 얻자 응원은 정점으로 치달았지만 김정미에 막히자 큰 탄식이 흘렀다. 전반 추가 시간 북한의 신예 공격수 승향심이 화려한 개인기로 선제골을 넣자 경기장은 떠나갈 듯한 환호로 뒤덮였다. 하지만 장슬기의 동점골 순간 일제히 침묵에 빠졌다. 경기 뒤 김정미는 “페널티킥 때 상대 선수에게 ‘어디로 찰 거야, 왼쪽으로 찰 거지’라고 조용히 말을 걸며 심리전을 걸었는데 통했던 것 같다. 경기 전날 페널티킥 연습이 신의 한 수였다”고 말했다. 동점골 주인공 장슬기는 “소음 대비 훈련이 효과가 있었다. 우리를 응원한다는 마음으로 뛰었다”고 미소 지었다. 윤덕여 감독은 “남은 두 경기에서 최대한 많은 득점을 할 수 있도록 잘 준비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평양=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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