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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서울대 사법시험 그리고 출세

입력
2017.04.0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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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6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 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6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 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한달 전쯤 친분 있던 영화 제작자에게 책을 한 권 건넸다. 김기춘(78)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2009년 출간한 ‘오늘도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이란 제목의 미공개 회고록이었다. 최근 그를 다시 만났더니, 흐뭇한 표정으로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책에 영화적 요소들이 두루 담겼다는 게 이유였다. 드라마틱한 성공스토리와 알려지지 않았던 권력다툼, 저자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다양한 정치적 사건과 극적인 침몰까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박수까지 쳤다. 그는 ‘출세’라는 두 글자로 김 전 실장의 78년 삶을 압축했다.

그렇다. 김 전 실장은 거제도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4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60년 서울대 법대 3학년 재학 중 제12회 고등고시(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전국의 수재들이 도전하는 사법시험을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합격한 만큼 자부심이 대단했다. 김 전 실장은 회고록을 통해 “해방 후 거제도에서 고등고시에 합격한 인물은 내가 최초이고, 거제도 출신으로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역임한 것도 내가 최초”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그는 초임 검사 때부터 검찰총장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35세에 최연소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에 오르더니, 42세에 차관급인 검사장으로 승진했고, 49세에 꿈에 그리던 검찰총장이 됐다. 이후에도 그는 법무부 장관과 3선 국회의원, 국회 법사위원장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김 전 실장은 회고록에서 그런 자신의 삶을 ‘성공’이라고 표현했다.

‘리틀 김기춘’이란 불린 우병우(50)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달려온 길도 출세와 성공으로 요약된다. 경북 변방인 영주 출신이었지만 그는 서울대 법대에 합격한 후 재학 중 ‘소년급제’해서 검사로 임관했다. 군 면제로 남들보다 어린 나이에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해 고배를 마셨지만 청와대 민정수석에 발탁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특히 수천억 원대 재산을 보유한 집안의 사위가 되면서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삶을 보장 받았다.

김 전 실장과 우 전 수석은 ‘개천에서 나온 용’에 비유되며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로 평가 받았다. 가난한 촌놈이 서울대에 입학해 사법시험을 통과한 뒤 남들보다 앞서 요직을 차지하는 모습은 성공스토리로 포장됐다. 흙수저들이 기를 쓰고 따라야 할 인물로까지 거론됐다. 그랬던 두 사람이 6일 법정과 검찰에 피고인과 피의자 신분으로 나란히 출석했다. 청와대 비서실장과 민정수석의 막강한 권한을 이용해 국정농단의 도우미 역할을 했다. ‘희망의 사다리’가 됐어야 할 두 사람은 이제 ‘타락한 천재’, ‘영혼 없는 지식인’의 표상이 됐다.

돌이켜 보면 그들 삶에 사회적 책임과 양심은 애당초 없었던 것 같다. 그들 삶의 기반이 됐던 서울대와 사법시험도 출세욕을 빨리 채우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 같다. 김 전 실장이 회고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사심 없이 나라와 겨레의 행복만을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적 정치지도자라고 확신한다”고 극찬한 점은 비뚤어진 그의 사고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선비로서 평생 명예를 먹고 살았다”고 밝혔지만, 지금 그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김 전 실장과 우 전 수석의 추락을 보면서 암울해지는 이유는 또 있다. 지금도 개천에서 나온 용을 꿈꾸며 서울대에 입학하려고, 또는 남들보다 빨리 출세하려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출세욕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 그렇게 양산된 인재들이 얼마나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까. 최근 19대 대선에 출마할 5개 정당의 후보자가 모두 정해졌다. 공교롭게 5명 모두 서울대 출신이거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지식인들이다. 출세욕에 사로잡힌 사람보다는 영혼이 맑은 인물이 대한민국을 이끌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강철원 사회부 기자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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