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선 표심 경향 분석해보니
한 달 남짓 남은 19대 대선. 각 당 후보들이 속속 확정되면서 혼잡했던 선거 구도는 2강-5자 대결로 압축됐지만,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에 따라 치러지는 조기 대선인 데다가 ▦문재인 대세론 유지 여부 ▦후보 간 단일화ㆍ연대 가능성 ▦수세에 몰린 보수 표심의 향배 등 판세를 흔들 변수들이 도처에 똬리를 틀고 있어 불확실성은 여전하다는 평가다.(▶관련기사)
민심의 최종 선택을 받을 후보가 누구일지 예측을 불허하는 선거이지만, 최근의 대선에서 감지되는 대한민국 표심의 흐름은 미진하나마 이번 대선의 향방을 전망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선거 당국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와 조사ㆍ통계 전문 학술기관인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가 대선 직후 표본조사를 통해 따로 또는 함께 작성해온 ‘유권자 의식조사’ 통계를 토대로, 문민정부가 탄생한 14대 대선(1992년)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18대 대선(2012년)까지 국민들의 대선후보 선택 경향을 들여다봤다.
지역보다 세대ㆍ이념이 승패 좌우
지역, 이념, 세대는 국내 선거 구도를 규정지어온 3대 근본 요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역대 대선 유권자 반응을 보면 지역 요인의 영향력은 약화하는 반면 이념ㆍ세대 요인은 갈수록 강한 힘을 행사하는 형국이라, 이번 대선에서도 이념ㆍ세대 변수가 얼마나 결정력을 발휘할지 주목된다.
지역은 이른바 ‘3김(金)시대’가 만개했던 80, 90년대 선거에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다. 영남을 주축으로 한 비호남권이 3당 합당을 통해 뭉쳐 호남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폈던 14대 대선, 호남-충청권이 영남에 맞서 연합한 15대 대선에서 지역주의는 특히 진가를 발휘했다.
다만 보수의 아성인 PK(부산ㆍ울산ㆍ경남) 출신 인사가 진보 후보로 나선 16대(노무현), 18대(문재인) 대선을 거치며 호남과 영남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기존 지역 구도가 상당히 누그러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단적인 예로 14,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PK 지역 득표율은 9.2~15.3%에 그쳤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27.1~35.3%, 문재인 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36.3~39.9%를 각각 얻으며 득표 기반을 확장했다. 후보 5명 모두가 영남 출신인 이번 대선에선 지역 변수가 더욱 힘을 잃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반면 이념과 세대는 이전보다 영향력이 강화되는 모양새다. 김대중-이회창 후보가 맞붙었던 15대 대선만 해도 보수층 유권자는 이회창 후보에게 1.4배(47.7%-34.7%), 진보층은 김대중 후보에게 1.9배(47.2%-24.3%) 더 많은 표를 줬다. 하지만 박근혜-문재인 후보가 대결한 18대 대선을 보면, 두 후보 모두 각자 이념적 성향을 함께 하는 유권자로부터 80%가 넘는 몰표를 받으면서 상대편 대비 득표 비율이 각각 4.3배(81.1%-19.0%), 6.1배(86.0%-14.0%)로 확대됐다(표 참조).
세대에 따른 투표 성향 또한 양극화하는 추세다. 15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보다 김대중 후보에 1.5배(43.2%-27.9%) 많은 표를 줬던 20대 유권자의 진보 후보 선호 경향은 18대 대선에 와선 그 비율이 2.0배(문재인 65.8%-박근혜 33.7%)로 뛸 만큼 강화됐다. 맞은편에선 보수 후보에 대한 장년ㆍ노년층의 ‘편애’도 심화됐다. 50대 이상 유권자가 15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준 표는 김대중 후보의 1.5배(51.0%-34.2%) 정도였지만, 18대 대선에선 보수 진영 박근혜 후보에게 50대는 1.7배, 60대 이상은 2.6배 많은 표를 안겼다.
지역을 불문하고 같은 연령대에선 유사한 이념 성향이 나타난다는 조사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이념과 세대 변수는 서로의 영향력을 상쇄하기보다 함께 맞물려 상승효과를 내는 경향이 있어 당분간 두 요인이 판세에 미칠 결정력은 커질 전망이다. 특히 이번 대선은 50대가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다. 2012년 18대 대선 때까지만 해도 ‘보수표밭’으로 분류됐던 50대 인구에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386세대’가 대거 편입하면서 ‘50대 후반=보수, 50대 전반=진보’라는 이념적 분화가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투표 명분은 인물ㆍ정책ㆍ정당
선관위와 KSDC는 유권자 의식조사에서 ‘지지 후보를 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요인’을 묻는데, 14대 대선 이후 줄곧 최고 응답률을 보인 항목은 ‘인물’이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15대 대선에서 ‘정치 경력’이 2위에 올랐던 일을 제외하면, 응답률 상위 2, 3위 역시 ‘정책ㆍ공약’ ‘소속 정당’으로 늘 같았다. 반면 ‘출신 지역’ ‘개인적 연고’는 응답률이 1%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역ㆍ세대ㆍ이념의 3대 요인이 역대 대선 구도를 좌지우지했다고 하지만, 유권자들이 의식적으로라도 대통령 후보 선택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3대 요인은 인물ㆍ정책ㆍ정당인 것이다.
KSDC가 18대 대선 직후 선관위와는 다른 항목으로 조사한 후보 선택 요인에서도 인물선거, 정책선거를 지향하는 유권자 의식이 뚜렷이 감지된다.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인 항목은 후보 능력(34.2%)였고, 정책ㆍ공약(30.7%), 소속 정당(10.8%), 도덕성(10.6%), 이념(9.1%)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주변 평가(3.1%), 출신 지역(0.6%)은 상대적으로 저조한 응답률을 기록했다.
인물 평가 요소로 분류되는 ‘능력’과 ‘도덕성’을 합하면 44.8%가 ‘사람’을 보고 한 표를 행사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런 경향성이 지속된다면 2강-5자 구도로 짜여진 이번 대선에서 후보 간 연대와 같은 ‘정치공학적’ 접근이 예상보다 힘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선관위 조사 항목에는 없는 ‘이념’을 기준으로 지지 후보를 택했다고 답한 유권자가 10%에 육박하는 점도 5월 대선 판도 전망에 시사점을 준다.
선거 관심 높으면 누구에게 유리?
지역ㆍ세대ㆍ이념이라는 ‘심층’과 인물ㆍ정책ㆍ정당이라는 ‘명분’ 외에도 유권자가 표심을 정하는데 작용하는 변수가 여럿임을 물론이다. 대표적 요인이 투표율과 이슈다.
투표율과 밀접히 연관되는 변수는 단연 세대다. 연령별 투표율이 상당한 편차(18대 대선에선 20대 투표율 68.5%, 60세 이상 80.9%)를 보이는 상황이 선거마다 반복되고, 세대별로 투표 성향이 확연히 갈리는 흐름이 강화되면서 투표율은 선거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선관위는 대선 직후뿐 아니라 대선 직전에도 유권자 의식조사를 시행하는데, 이 사전조사 결과를 보면 역대 대선 투표율은 해당 선거에 대한 관심도와 비례하는 경향을 보인다. 14대(81.9%)부터 17대(63.2%)까지 줄곧 하락하던 대선 투표율이 18대 대선(75.8%)에서 대폭 오른 것도 그해 선거 관심도(84.7%)가 17대(73.2%)에 비해 10%포인트 넘게 반등한 현상과 궤를 같이 한다. 이번 대선 역시 국민적 관심도에 따른 투표율 향방에 크게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선거 시즌의 주요 사회 현안 역시 판세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일례로 KSDC 유권자 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치러진 15대 대선에서는 김대중-이회창 후보 중 어느 쪽을 위기를 해결할 후보로 여기는지에 따라 표심이 급격히 쏠렸다. 이회창 후보가 적임이라 여긴 유권자의 96.2%, 김대중 후보를 적임자로 본 유권자의 70.3%가 각각 그 후보에게 투표한 것이다. 18대 대선에서도 ‘대북정책’을 중대 현안이라 여긴 유권자의 87.3%는 박근혜 후보, ‘정치개혁’이 중요하다 여긴 유권자의 63.7%는 문재인 후보에게 각각 투표한 것으로 조사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선 투표자의 절반 이상이 한 달 이상 전에 지지 후보를 결정하는 현상이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김영삼-김대중-정주영에 박찬종 후보까지 가세하며 다자구도에 가깝게 치러진 14대 대선(38.0%) 정도가 예외였다. 한 달도 전에 지지할 후보를 정한 유권자가 57.4%에 이르렀던 18대 대선의 경우 선거 1주일 전에는 10명 중 9명 이상(91.8%)이 표를 줄 후보를 마음 속에 정하고 있었다. 다만 대통령 탄핵 후 60일 안에 치러야 하는 이번 대선의 경우엔 후보 선택에 있어 이전보다는 잦은 ‘변심’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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