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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죽어도 좋다” 대항마로 거듭난 강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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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죽어도 좋다” 대항마로 거듭난 강철수

입력
2017.04.0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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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으로 PC백신 개발 무료 배포

의사 길도 포기하고 ‘안랩’ 설립

전국서 청춘콘서트 국민 멘토로

서울시장 보궐선거 박원순에 양보

지난 대선 땐 文과 단일화에 진통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한계 드러내

친문과 갈등 후 홀로서기 나서

20대 총선에선 ‘녹색 돌풍’ 이끌어

안철수(55) 국민의당 대선후보의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도전’이다. 의사에서 벤처기업가로, 대학교수에서 직업정치인으로 안 후보는 삶의 변곡점마다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그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직업을 바꿨지만 도중에 그만둔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했다. 2012년 ‘안철수 현상’의 바람을 타고 “건너온 다리를 불살랐다”며 정치에 뛰어든 지 5년. 당시 혈혈단신의 무소속 후보로 대선 도전에 나섰던 때와 달리, 이젠 제3당 대표후보로 거듭났다. 점잖던 이미지도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강(强) 철수’로 변모했다. 다시 맞은 ‘안철수의 시간’에서 그가 새정치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의사에서 벤처사업가로

안 후보는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친 안영모(87)씨는 서울대 의대를 나와 판자촌인 부산 범천동에 개원했다. 어머니 박귀남(82)씨는 안 후보를 존대하며 키웠다. 아내와 딸, 직원에게 존대한다는 안 후보의 성격은 부모의 영향에서 비롯됐다. 안 후보는 내성적이었지만 지독하게 책을 읽는 독서광이었다.

1980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그는 1983년 컴퓨터를 구입해 독학으로 공부했다. 1988년 컴퓨터 바이러스가 나돌자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했다. 오전3시에 일어나 오전6시까지 백신을 만들고, 낮에는 교수(1989~1991년), 군의관(1991~1994년)으로 사는 이중 생활을 계속했다. 1995년에는 아예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안철수 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안랩)’을 설립했다.

지금은 성공한 벤처사업가로 여겨지지만, 안랩 설립 초기 직원 월급 줄 돈도 빠듯했다. 그는 “당시 소원이 ‘단 한달만 월급 걱정 안하고 살았으면’이었다”고 했다. 직원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감정 표현을 잘 안 하는 습관도 생겼다. 1999년 체르노빌 바이러스가 국내 유입되고 안랩이 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회사 주가도 치솟았다.

2005년 대표직을 내려놓고 유학길에 올랐다. 2008년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친 뒤 카이스트 석좌교수로 임용됐다. 2011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가 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장 시절 직접 개발한 백신제품을 들고 미소를 짓고 있다. 안철수 캠프 제공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가 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장 시절 직접 개발한 백신제품을 들고 미소를 짓고 있다. 안철수 캠프 제공

‘안철수 현상’의 주역

2009년 6월 MBC 예능 프로그램 ‘무릎팍 도사’ 출연해 대중적 주목을 받은 안 후보는 2011년 25개 도시를 돌며 가진 ‘청춘콘서트’로 젊은층의 멘토로 거듭났다. 그 해 8월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 부결로 사퇴한 뒤 서울시장 출마를 고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안 후보는 기성 정치판을 흔드는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지지율 50%의 유력 후보였던 그는 지지율 5%의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에 후보 자리를 양보했다. 박 이사가 실제 시장에 당선되고 안 후보가 안랩 주식 절반(당시 1,500억원 가치)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인기는 더욱 치솟았다. 서울시장 후보를 넘어 유력 대선 후보로 급부상한 것이다. 이른바 ‘안철수 현상’이 한국사회를 흔들었다.

2011년 9월 박원순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재보선 후보를 양보한 뒤 포옹하고 있는 안철수 후보.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1년 9월 박원순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재보선 후보를 양보한 뒤 포옹하고 있는 안철수 후보.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치인 안철수의 시련과 도전

하지만 정치인으로의 변신은 쉽지 않았다. 2012년 대선이 코 앞에 다가오는 데도 출마 여부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아 ‘간만 본다’라는 역풍이 커졌다. 9월 20일 “제게 주어진 시대적 숙제를 감당하겠다”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지만 현실 정치의 벽은 높았다. 11월 문재인 민주당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여론조사 지지율이 밀리면서 결국 대선 후보 자리를 양보했다. 기성정치에 대한 환멸과 새 정치에 대한 기대감이 안 후보에게 몰려들었지만, 그 민심을 뒷받침하는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었다.

대선일에 맞춰 미국행을 택했던 안 후보는 이듬해 4월 노원구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며 예상보다 일찍 현실 정치에 복귀했다. 하지만 시련의 연속이었다. 2014년 1월 새정치연합을 창당한 뒤 3월 곧바로 민주당과 합당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올랐지만 낡은 정치에 올라탔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당 대표로 세월호 참사 국면 속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를 이끌었지만 모두 참패했다. 정치력이 도마에 오르며 ‘안철수 현상’도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안 후보는 2015년 12월 친문 진영과의 갈등 끝에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며 홀로 서기에 나섰다. 그의 말대로 “허허벌판에 혈혈단신으로” 나선 길이었다. 안 후보는 이듬해 탈당한 민주당 호남계 의원들과 함께 국민의당을 창당해 4월 총선에서 지역구 25석, 비례대표 13석을 확보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야권 단일화 요구를 거부하고 “광야에서 죽어도 좋다”는 결기로 ‘자강론(自强論)’을 밀어붙여 일궈낸 성과였다. 정치인 변신 후에 거둔 사실상의 첫 결실이었다. 정치적 재평가도 이루어졌다. 안 후보는 지난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지지율이 다시 추락하며 부침을 거듭하다 최근 지지율 2위로 급상승하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안 후보는 지난달 20일 19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마침내 안철수의 시간이 왔다. 기필코 대선에 승리하겠다”고 했다.

정지용 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지난해 4ㆍ13 총선에서 당선이 확실시되자 부인 김미경씨와 함께 손을 들고 인사하는 안철수 후보.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4ㆍ13 총선에서 당선이 확실시되자 부인 김미경씨와 함께 손을 들고 인사하는 안철수 후보.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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