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수(작가)는 박근혜(전 대통령)한테 저작권료 줘라”(@redf****) “‘귓속말’ 작정했네”(@sinc****) 이런 반응이라면 ‘최순실 드라마’의 탄생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지난달 27, 28일 방송을 시작한 SBS 드라마 ‘귓속말’이 통렬한 사회 비판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뜨겁게 달궜다. 국정농단사태가 불거진 이후 대중문화 각 분야에서 풍자 콘텐츠가 쏟아져 나왔지만 이렇게 ‘직접적’이고 ‘본격적’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낸 작품은 없었다.
박경수 작가와 연출자 이명우 PD는 현 시국을 이식하듯 드라마에 담았다. 에둘러 비유하거나 단순 인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대사와 사건을 통해 직설 화법으로 풀어낸다. SBS ‘추적자’(2012)와 ‘황금의 제국’(2013) ‘펀치’(2015) 등 ‘권력 3부작’을 통해 정치ㆍ경제ㆍ사법 권력을 해부한 박 작가의 펜 끝이 또 한번 날카롭게 현실을 파고들었다.
‘귓속말’은 ‘법비(法匪)’를 정조준한다. 법 위에 군림하며 권력을 농단한 법조인 출신 청와대 인사들과 법조계의 견고한 카르텔에 사회적 공분이 높아진 세태를 반영한다. 드라마의 주무대인 거대 법률회사 태백은 법을 악용해 한국 사회를 주무른다. 태백은 방산비리를 파헤치던 해직 기자 신창호(강신일)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고 정의로운 판사 이동준(이상윤)을 나락으로 내몰아 결국 신창호에게 유죄를 선고하도록 만든다. 아버지를 구명하려던 경찰 신영주(이보영)는 수사 기록 유출이 문제가 돼 파면된다. “유출 과정이 아니라 수사 내용을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신영주의 일침에서 2014년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 유출 사건을 떠올리란 그리 어렵지 않다.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태백의 대표 최일환(김갑수)에게 유일한 걸림돌은 공동대표 강유택(김홍파)이다. 최일환이 추진하던 청룡전자 해외매각 건은 강유택의 전화 한 통에 무산된다. 강유택이 통화한 곳이 바로 청룡전자의 최대주주 국민연금공단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의 비리 의혹을 고스란히 가져온 설정이다. 국민연금공단에서 연락이 오자 강유택의 비서가 휴대폰을 옷에 닦아 강유택에게 건네주던 장면도 대통령의 비밀 의상실에서 몰래카메라에 찍힌 최순실과 이영선 전 청와대 행정관의 모습을 패러디했다. 태백의 문고리 실세인 비서실장 송태곤(김형묵)은 스폰서 사건으로 파면된 검사 출신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제 사건을 연상케 한다.
서슬 퍼런 대사도 무심코 흘려 들을 수 없다. “기다려라, 가만히 있어라,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아직도 하늘에서 진실이 밝혀지길 기다리고 있겠죠”라며 세월호 참사를 직접 거론하고, “국가 기밀도 서류로 들고 나가는 세상입니다”라는 대사로 현실을 소환한다. 줄기세포 치료, 입시 비리에 가담한 대학총장 등도 주인공의 입을 통해 등장한다. 드라마 도입부에는 “본 드라마의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모두 창작된 것으로 실제와 관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라는 자막이 뜨는데, 드라마가 현실에 기반했다는 걸 오히려 반증하는 듯하다. 덕분에 ‘귓속말’은 동시대성을 획득하며 시청자와 공감대를 이룬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드라마가 명확한 문제의식이 없다면 눈앞의 현실을 소재로 가져오더라도 공감 어리게 다루기는 쉽지 않다”며 “‘귓속말’은 실제 사건을 풍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 권력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권력의 작동 방식 자체를 건드리는 비판의식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귓속말’은 국정농단사태의 직접적 영향으로 탄생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애초 박 작가는 ‘진격’이란 드라마를 준비했다. 지난해 6월엔 이병헌이 캐스팅 물망에 올랐으나 스케줄 문제로 무산됐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 국정농단사태의 몸통이 드러나 한국 사회가 충격과 분노로 들끓었던 10월 말 즈음 박 작가는 그간 준비해오던 드라마를 완전히 엎었다. 그리고 새로 꺼내든 작품이 ‘귓속말’이었다. 이명우 PD는 “국민들의 답답한 심정을 해소해줄 수 있는 진짜 같은 드라마이길 원했다”며 “실제 사건들을 드라마에 반영했다”고 밝혔다.
심지어 조ㆍ단역에는 실제 인물을 염두에 두고 외모와 분위기가 비슷한 배우를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 PD는 “뉴스 검색을 하면 나오는 사진과 너무 닮아서 흠칫 놀란 적도 있다”고 했다. 아직 초반부라 그 인물들이 많이 나오진 않았지만, 2회에서 국정조사 청문회를 준비하던 청룡전자 회장은 최순실처럼 묘사하려 했다는 설명이다. 이희수 기획 PD는 “배우에게 선글라스도 쓰게 하려다 지나치게 직접적인 묘사라 그 설정은 덜어냈다”며 “매회마다 현 시국을 담아내 드라마의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드라마가 현실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감성적 측면이 아쉽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덕현 평론가는 “상충하는 인물들의 입장을 균형 있게 맞추되 시청자를 인도할 주인공의 시선이 뚜렷하게 드러나야 몰입할 수 있는데 그 지점이 다소 미흡하다”며 “주인공이 어떤 면모로 시청자들에게 보편적 공감대를 얻을 것인지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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