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전투포인트, 기록에 장애
당시 전산시스템 고장 일으켜
美 국방부 귀국 특별명령 내려
변호사로 이민자 무료 자문 활동
‘대위는 즉시 귀국하라.’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4월, 미 국방부는 특별한 명령을 주한 미군에 하달했다. 제7사단 31연대 소속으로 무공훈장을 2번이나 받은 존 피츠패트릭(John R. Fitzpatrick) 대위를 귀국시키라는 것이다. 비겁행위나 군기문란 때문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너무 오래 용감하게 싸웠고, 미군의 첨단 전산시스템을 위협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53년 4월2일자 뉴욕타임스(NYT)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에 온 뒤 2년6개월이나 최전선을 지키고 있는 피츠패트릭(29) 대위. 그가 귀국 명령을 받았다. 귀국에 필요한 전투 포인트(40점)를 넘기고도 계속 전장을 지키는 바람에 99포인트까지만 셀 수 있는 전산시스템이 고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강제 귀국조치 당시 포인트는 129점이었다.
이 기사를 통해 피츠패트릭 대위는 한국전 참전 미군 178만명 가운데 미 국방부가 공식 인정한 한국에서 가장 오래 용감히 싸운 장병이 됐다. 일반 장병의 경우 40점을 쌓은 뒤 6개월~1년이면 귀국한다. 40점을 쌓는데는 통상 6개월 정도 걸리는 데 그는 일반 장병보다 3~4배에 해당하는 점수를 쌓을 때까지 전투를 한 것이다. 토마스 스티븐 한국전 참전용사협회장은 워싱턴 포스트(WP)에 “만약 그가 한국에서 2년반 가량 참전했다면 정말 예외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을 지키기 위해 20대 젊음을 바친 피츠패트릭 예비역 미군 대령이 지난달 7일 93세로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자택에서 영면했다. 고령에 의한 만성신부전증 때문이었다.
1923년 워싱턴DC에서 태어난 그는 1944년 사우스 캐롤라이주 시터델 사관학교 재학 중 징집돼 필리핀 마닐라 전투에 참가했고 한국전쟁 이전에는 점령군으로 일본에 주둔했다. 강제로 한국을 떠난 뒤에도 계속 군에 남아 베트남전에 군사고문으로 파견됐고 1972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제대 후 1976년 가톨릭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고향 인근인 버지니아주 맥클린의 한 로펌에서 상법과 부동산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중남미 이민자들을 위한 무료 법률자문에도 나섰다.
유가족은 61년을 해로한 부인(루스 피츠패트릭)과 2남1녀가 있다. 고인의 장남인, 미 국무부 서반구국의 마이클 피츠패트릭 부차관보는 2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평소 부친께서는 당시 행동에 대해 어려운 처지의 한국을 돕고 전우들과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을 다시 찾지는 앉았지만, 한국이 정치ㆍ경제적 기적을 이룬 것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기셨다”고 강조했다. 패트릭 부차관보에 따르면 고인의 한국어 실력도 수준급이어서, 거리나 상점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웬만한 대화는 한국어로 나눌 정도였다.
한편 WP 등 미국 주요 언론은 ‘한국전 영웅’의 사망을 부고기사로 크게 게재했지만, 정작 주미 한국대사관은 고인에 대해 아무런 예의도 갖추지 않고 있다. 유가족들은 “한국 대사관 측 연락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워싱턴=조철환 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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