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오후 미국 투자이민 설명회가 열린 중국 베이징(北京) 도심의 한 호텔 로비. 초청장이 없으면 출입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텔 로비에서 서성이는 이들이 꽤 많았다. 톈진(天津)에서 왔다는 쑤(蘇)모씨는 “투자이민비자(EB-5)를 받으려고 3년 전부터 준비해왔는데 트럼프 미국 대통령 때문에 불안해서 와봤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후 이민 문턱을 높이자 누구보다도 중국 부자들이 불안해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린카드(미국 영주권)를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어서 ‘황금비자’로 불리는 EB-5를 얻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외국인 이민을 허용하는 제도의 하나로 EB-5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자국민에 대한 일정 수준 일자리 보장을 전제로 외국자본의 투자를 끌어오면서 그 보상책으로 영주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EB-5가 황금비자로 불리는 이유다. 돈 많은 외국 부자들은 이 비자를 얻기 위해 일정 수의 미국인을 고용하기도 쉽고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었다. 미국 정부는 이를 부동산 경기를 떠받치는 한 축으로 활용해왔다.
개혁ㆍ개방 후 ‘돈 맛’을 본 중국 부자들이 이 제도를 적극 이용하면서 미국은 그간 중국에서만 140억달러(약 27조원)를 유치해 2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아시아소사이어티에 따르면 2015회계연도 기간 발급된 9,764개의 EB-5 중 무려 84%(8,156개)를 중국인이 차지했다. 중국 내엔 관련 업무를 대행하는 회사가 900개가 넘는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공화당이 다수인 미국 의회가 최근 EB-5를 취득을 위한 최소투자금액을 50만달러에서 135만달러로 올리는 방안을 논의하면서 중국 부자들이 좌불안석이다. 2016회계연도 EB-5 신청이 끝나는 이달 말에는 투자금액을 상향조정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면서 그 전에 신청하려는 이들이 몰려 일부 유명 컨설팅 업체들의 업무도 폭주하고 있다. 미 부동산 개발업체의 중국 에이전시인 쑨밍쥔(孫明軍)은 “고객들의 신청 요구가 빗발쳐 거의 매일 연장근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부자들의 불안감이 커지는 또 다른 이유는 중국 금융당국이 자본유출 통제를 갈수록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선 1인당 연간 환전 규모가 EB-5 신청 기준의 10분의 1인 5만달러여서 비자업무 대리인이 여러 사람의 이름을 빌려 분산 송금하는 스머핑(smurfing)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난해부터 단속 강도가 부쩍 세졌다. 그간 짧게는 3~5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조심스레 준비해서 황금비자를 손에 넣었던 중국 부자들 입장에선 내우외환에 직면한 셈이다.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집권 후 미국을 향해 ‘신형 대국관계’를 주장하고 있다. 중국의 국력이 커진 만큼 일방적으로 끌려가지는 않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간 중국 부유층 내 황금비자 열풍과 최근 만연한 불안심리는 “식당에서 영어 쓰는 외국인에게만 친절하다”는 중국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베이징=양정대 특파원 torc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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