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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없는 교황보다 성서 가진 평신도를 믿어라”

입력
2017.04.02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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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의 이단 재판 거부

루터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공식 토론인 라이프치히 논쟁서

교황의 권위를 놓고 에크와 격론

*“교황은 敵그리스도” 규정

그리스도의 가면을 쓰고 유혹해

인간을 타락시키는 존재라 주장

결국 루터는 로마와 완전히 결별

1519년 마르틴 루터와 요한 에크 사이에 벌어진 라이프치히 논쟁을 묘사한 독일 화가 율리우스 휘브너의 1864년작. 3주간의 논쟁 끝에 루터는 교황을 버렸다.
1519년 마르틴 루터와 요한 에크 사이에 벌어진 라이프치히 논쟁을 묘사한 독일 화가 율리우스 휘브너의 1864년작. 3주간의 논쟁 끝에 루터는 교황을 버렸다.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것은 루터가 게시한 ‘면죄부 효용성의 해명을 위한 논쟁’이다. 95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 ‘95개조 논제’라고 불리는 이 문건은, 당시 대학의 관례에 따라 신학적인 쟁점들에 대하여 공개적인 토론을 벌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토론은 성사되지 않고 ‘95개조 논제’가 인쇄술이라는 ‘모던한’ 매체를 통해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루터의 적대자들이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보다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비판을 더 문제시했다는 사실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떻게 보면 교황에 대한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영광의 신학’ 대신 ‘십자가의 신학’을 전면에

1518년 4월 루터의 종교개혁과 관련된 첫 번째 논쟁인 ‘하이델베르크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루터가 소속된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총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에서 루터는 자신의 95개 논제에 대한 토론을 벌여야 했다. 4월 26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된 토론에서 루터는 자신의 견해를 40개의 논제로 정리하여 발표했는데, 그 핵심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바울의 신학에 근거하여 ‘영광의 신학’을 비판하고 ‘십자가 신학’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인간의 영광만을 찾는 것이 영광의 신학이라면, 신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계시되었다고 보는 것이 십자가 신학이다. 성서는 십자가의 증언이다.

1518년 초 도미니쿠스 수도회가 교황청에 공식적으로 루터를 이단으로 기소했으며, 그해 7월 7일 교황청은 루터에게 60일 이내에 로마로 와서 이단재판을 받으라는 소환장을 보냈다. 그러나 루터는 이에 응하지 않고 자신의 군주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賢公)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실 프리드리히 현공은 열렬한 면죄부 수집가이자 성유물 숭배자로서 루터의 추종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청을 받아들였는데, 그 이유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인 루터에 대한 교황청의 이단재판은 작센 선제후국의 교회 문제에 대한 로마의 내정간섭이라고 생각해서였다.

프리드리히 현공 덕분에 루터는 로마에 가지 않고 1518년 10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도미니쿠스 수도회 회장이자 추기경인 토마스 카예탄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당시 그는 교황의 전권대사로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카예탄은 루터에게 자신의 견해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지만 루터는 단호히 거부하고 공의회의 결정을 요구했다.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교황권을 부인하다

1519년 6~7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논쟁이 벌어졌다. 사적인 청문회 성격이 강한 아우크스부르크 심문과 달리 라이프치히 논쟁은 공식적인 토론이었기 때문에 신학자들과 교회법학자들로 구성된 공식 재판관들이 배석했다. 라이프치히 논쟁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그 하나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 칼슈타트와 잉골슈타트 대학의 신학교수인 요한 에크 사이에 벌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루터와 에크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1519년 6월 27일 월요일부터 7월 15일 금요일까지 3주에 걸쳐 휴일을 제외하고 장장 15일 간 진행된 논쟁에서 칼슈타트와 에크가 첫 주에 4일과 3주째 마지막 이틀간 토론했고, 루터와 에크의 토론에 7월 4일부터 14일까지 대부분의 시간이 할애되었다. 루터-에크 토론의 핵심은 교황의 권위에 있었다. 에크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이 교회의 머리이며, 따라서 교황권은 신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루터는 교황이 아닌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따라서 교황권은 아무런 성서적 근거도 없이 인위적으로 부여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에크는 루터가 얀 후스와 같은 부류라고 비난했다. 후스는 체코의 종교개혁자로서 이미 100여 전에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교황의 권위는 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당했다. 에크의 비난에 대해 루터는 후스의 신학적 견해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적이고 복음적이라고 반박했으며, 이러한 후스를 처형한 공의회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교황도 공의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 루터의 견해였다. 둘 다 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모든 신학적 권위의 근거로 성서를 내세우며 이렇게 역설했다. “성서가 없는 교황과 공의회보다 성서를 가진 평신도를 믿어야 한다.”

“교황은 적(敵) 그리스도다”

1520년 5월 말에 펴낸 책에서 루터는 라이프치히 논쟁에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가톨릭에서는 교황이 기독계의 유일하고 영원한 머리이며, 따라서 교황의 신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 이단이라는 교황주의적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에 맞서 루터는 성서에 준거하면서 교황을 ‘적(敵)그리스도’로 규정했다. 신약성서의 여러 곳에 적그리스도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예컨대 요한1서 2장 22절은 다음과 같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니.”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적대자인데 그리스도의 가면을 쓰고서 인간을 그리스도로부터 교묘하게 유혹하여 죄를 짓고 타락하도록 만드는 존재를 가리킨다. 교황이 바로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로마와 완전히 결별했다. 루터가 ‘적그리스도’로 칭한 교황은 후일 루터를 자신이 즐겨 사냥했던 ‘멧돼지’라 부르며 파문한다.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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