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외치는 듯하다. 입이라도 잘못 뻥긋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던 시대, 80년대가 스크린을 통해 들춰지고 있다. 그 시절 민주화를 외치던 대학생들은 무조건 그 어딘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 일쑤였고, 일반 시민들도 간첩으로 낙인 찍혀 생사를 오가기도 했다. TV에선 ‘땡전 뉴스’(전두환 전 대통령을 첫 소식으로 전하는 뉴스를 비하해서 부른 말)가 도배됐고, 길거리엔 최루탄 연기가 가득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인 80년대가 줄줄이 영화로 나오고 있다. 올 초 개봉한 ‘더 킹’을 시작으로 지난달 29일 개봉한 영화 ‘보통사람’이 관객을 만났다. 여름 개봉 예정인 ‘택시운전사’는 1980년 서울의 택시기사(송강호)가 취재에 나선 독일기자를 광주로 태우고 가는 이야기를 그렸고, 이달 크랭크인 예정인 영화 ‘1987’은 1987년 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그리며 아픔의 역사를 다시 한번 소환한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우리의 역사, 80년대를 그린 영화들을 살펴봤다.
‘보통사람’(2017)
가슴 한 쪽이 짠해지는 제목이다. 영화는 1987년을 조명한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군사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면서 국민적 분노를 일으킨 시기였다.
‘보통사람’은 1987년을 복기하며 산동네에 사는 평범한 가장이자 강력계 형사 성진(손현주)과 그와 막역한 사이이면서 사명감이 투철한 기자 추재진(김상호)을 등장시킨다. 막걸리를 기울이며 혼란한 시대를 서로 위로하던 두 사람은 연쇄 살인사건을 풀어가던 도중 삶의 기로에 선다.
안기부 실장 규남(장혁)은 연쇄 살인범 용의자로 검거된 태성(조달환)이 범인이라며 성진에게 접근한다. 성진은 규남의 은밀한 공작을 눈치채면서도 언어장애가 있는 아내와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아들을 떠올리며 가담한다. 그러나 재진은 취재 중 안기부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성진에게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평범한 아버지 성진은 부를 향한 유혹의 손길을 뿌리칠 수만은 없다.
사건을 파헤치던 재진은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다 사망한다. 이 소식은 성진을 비롯해 소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거리로 몰려드는 시민들의 비장한 표정은 민주화를 향한 의지로 발현된다.
재진의 모습은 같은 해 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고인으로 인해 민주화의 불씨가 된 1987년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화려한 휴가’(2007년)
1980년 5월 광주의 뜨거웠던 자유와 민주에 대한 열망을 직접 화법으로 풀어낸 영화다. 계엄군들의 총에 희생되는 광주의 학생과 시민들의 핏빛 역사를 숨가쁘게 담아냈다. 5.18 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첫 작품이다.
어릴 적 부모를 여의고 광주에서 택시기사를 하는 민우(김상경)는 오직 하나뿐인 동생 진우(이준기)만을 바라보며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평범했던 일상이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무고한 시민들이 군에 의해 총과 칼로 폭행에 죽임을 당하며 쓰러진다. 80년 5월 18일의 현장이 참혹하게 재현된다.
이유도 없이 가족과 친구들을 잃은 사람들은 퇴역 장교 출신 택시회사 사장 흥수(안성기)를 중심으로 시민군을 형성한다. 고등학생 진우도 절친한 친구가 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학교 친구들과 함께 계엄군에 맞선다. 영화는 그날 민주화를 넘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총칼 앞에 맨 몸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소시민들의 열흘간의 흔적에 귀 기울였다.
영화는 5월 18일부터 열흘간 도청에서 벌어졌던 실화를 바탕으로 완성됐다. 도청 앞에서 벌어지는 1,600명의 대규모 시위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특히 제작진은 계엄군에 대항하던 시민군의 사연을 영화에 반영한 대목은 깊은 울림을 준다.
택시운전을 하다 시위에 가담해 도청 앞에서 사망한 김복만씨, 카톨릭농민회 회원들과 시위에 동참했다가 도청에서 숨을 거둔 홍순권씨,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자 가두방송을 했던 전옥주씨, 총을 맞고 쓰러진 생존자를 구하러 나갔다가 목숨을 잃은 양회남씨 등의 사연이 스크린을 타고 관객의 가슴을 적셨다.
‘남영동 1985’(2012)
80년대의 쓰디쓴 진실을 건드리는 영화다. ‘부러진 화살’(2012)의 정지영 감독이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모티브로 했다. 그가 겪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의 비인간적 고문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고통 받은 순간이 낱낱이 기록돼 있다.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1985년 9월 4일 영문도 모른 채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로 끌려간 김종태(박원상)가 모진 고문 끝에 간첩 활동에 대한 거짓 진술을 하게 되는 22일간의 기록을 그린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당시 경찰 공안수사국이 간첩을 축출해낸다는 명목으로 사건을 조작하던 고문실이었다. 김종태는 시멘트 바닥에 질질 끌려 다니며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문 속에 거짓 진술서를 강요 받는다. 김종태가 진술을 거부할수록 수사관들은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잔혹한 고문을 일삼는다. 그러다 김종태는 고문기술자 이두한(이경영)을 만나 지울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다.
김종태의 고통은 80년대 대한민국의 어두운 자화상이기도 하다. 영화는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조차 쉬쉬하던 역사의 한 그늘을 끄집어내며 독재정권 하에 자행된 추행을 되살렸다. 국가보안법이라는 명분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죽어간 현대사의 비극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26년’(2012)
고통스런 과거는 미래까지 지배한다. ‘26년’은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2세들이 ‘그 날’의 주범인 ‘그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는 이야기다. 2006년 연재된 강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영화는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조직폭력배 진배(진구), 국가대표 사격선수 미진(한혜진), 서대문소속 경찰 정혁(임슬옹)이 극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보안업체 대기업 회장이 제안한 ‘그 사람’을 타깃으로 삼은 암살 프로젝트다. 상당히 도발적인 발상이다. 억압과 핍박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었던 게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었다. 하지만 ‘26년’은 대놓고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저격한다는 내용이라 파격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그 분’이 산다는 연희동 자택에 들어가 총구를 겨눈다는 설정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을 전했다. 그렇지만 영화도 조심스러웠나 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는 호칭 대신 ‘그 사람’ ‘전 대통령’이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쉽게 풀 수만은 없는 내용 탓이었을까. ‘26년’은 2008년부터 제작이 시도됐지만 번번히 무산되며 고행의 길을 걸었다. “외압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렇게 4년 간 유랑하다 크라우딩 펀딩을 통해 제작비를 모아 제작됐다.
‘26년’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눈물을 쏟게 된다.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5.18 현장을 담은 애니메이션이 아프고 또 아프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잔혹한 그 날의 아픔을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서다. 그 날의 주범인 ‘그 사람’을 제거해야 하는 이유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애니메이션이라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강한 여운을 남겼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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