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카트만두 시내 외곽에 있는 왕립네팔골프장은 네팔인들의 ‘성지’다. 빼어난 시설 때문이 아니다. 2015년 4월 9,000여 명이 사망한 7.8규모의 네팔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수십 대의 헬리콥터가 필드를 오르내렸다. 골프티 대신 피난 텐트가 빼곡히 들어섰다. 그렇게 골프장은 2,000 여명 네팔인들의 ‘난민 수용소’가 됐다. 이 ‘절망의 골프장’은 네팔 최초의 여성 프로골퍼를 꿈꾸는 18세 소녀의 집이기도 하다. 22일 미국 스포츠 매체 ESPN은 네팔 주니어 골프선수 프라티마 셰르파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관련기사
프라티마의 부모는 골프장에서 잔디를 깎고 볼을 줍는다. 하루에 받는 돈은 2.5달러(약 2,800원). 대신 4번 홀 근처의 창고를 집으로 쓰고 있다. 침대 두 개와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화장실 크기만한 창고에서 프라티마 셰르파가 태어났다. 골프장에서 나고 자란 그가 골퍼의 꿈을 꾼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골퍼들의 스윙을 흉내 내는 게 일상인 11세의 프라티마에게 네팔의 프로 골퍼 사킨 브하타라이가 안 쓰는 골프 클럽을 선물했다. 프라티마의 첫 골프채였다.
네팔 내에서의 성적은 빼어나다. 이번 시즌에만 아홉 번의 토너먼트에서 일곱 번 우승했다. 한 달 전 네팔에서 열린 칼스버그 클래식 투어에서는 한 라운드에 4개의 버디를 잡아내며 우승을 차지했다. 코치 브하타라이는 “프라티마는 ‘킬러 스윙’을 한다”고 치켜세웠다.
프라티마는 ‘변화하는 네팔’의 상징이기도 하다. 네팔은 불과 10년 전에야 입헌군주제를 폐지했다. 2015년에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도 탄생했다. 240년 간 여자에게 교육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던 네팔에서 프라티마가 프로 골퍼의 꿈을 키울 수 있는 이유다. 현재 네팔에 등록된 약 90명의 프로 골퍼 중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
프라티마의 ‘키다리 아저씨’는 미국의 유명 캐디 올리버 호로비츠다. 그는 지난해 네팔에서 라운딩을 하던 도중 퍼팅을 연습하는 프라티마를 보고 기꺼이 그녀의 캐디가 됐다. 호로비츠는 미국에 돌아간 뒤 후원 홈페이지까지 만들어 프라티마의 이야기를 전세계로 알리고 있다. 그는 “프라티마는 내 골프인생에서 가장 큰 영감을 준 영웅”라고 말한다.
올해 프라티마는 중국에서 열리는 ‘팔도 시리즈 주니어 토너먼트’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지만 포기했다. 팔도 토너먼트는 세계 주니어 골퍼들을 발굴하는 등용문이다. 그러나 골프장에서 태어난 프라티마는 출생신고가 안 돼 있어 여권이 없었던 것. 이 소식을 들은 미국 관계자가 입양을 제안했다. 프라티마는 이 무례한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프라티마의 꿈은 2020년 도쿄 올림픽에 네팔 대표로 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 실력이 모자라다는 걸 잘 알아요. 그래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건 골프채를 휘두르는 순간뿐입니다.” 그래서 카트만두 거리와 철제 펜스 하나로 구분된 네팔왕립골프장에서는 늘 프라티마의 연습 장면을 볼 수 있다. 올림픽 출전 꿈을 위해 3개월간 지속되는 우기에도 프라티마의 퍼팅은 계속되고 있다.
오수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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