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거꾸로 간 인생… 탄핵ㆍ검찰소환ㆍ구속 ‘불명예 수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력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줄이 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그는 문인이었다. 1993년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을 시작으로 6권의 책을 냈다. 대부분 수필집이라 하더라도 평소 그의 언설을 떠올리면 기이한 일이다.
갸우뚱 하던 참에 그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2007)를 읽어봤다. 생각보다 잘 읽혔다. 하긴 직접 자서전을 쓰는 정치인이 몇 안 된다고 하니 이상할 일도 아니다. 다만 자서전의 재료를 모아 주는 건 본인이다. 총탄에 부모를 잃고 배신과 고독의 세월을 겪었지만 결국 정치 지도자로 우뚝 선 성공 서사. 그 기억은 온전히 그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엮어진 책 속의 과거는 우리가 알게 된 현재와 크게 어긋나고 있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라고 달라질 건 없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는 3남매가 특권의식에 빠져 성장하는 걸 경계했다 한다. 그래서 그는 비싼 물건을 내보이는 걸 삼가고 외교사절로 나갈 때도 어머니의 장신구를 빌려 썼다고 했다. 청와대에 놀러 온 친구가 자기 집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에 실망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초심을 지키기엔 아버지의 집권이 너무 길었던 걸까. 아니면 부모를 잃은 충격으로 사람이 바뀐 걸까. 청와대에서 공주처럼 자랐다고 해도, 18년의 칩거생활은 홀로서기가 가능한 시간이었다. 책대로라면 수필을 쓰고 명상을 하며 산천을 주유하며 말이다. 하지만 밝혀진 사실은 달랐다. 잠자고 숨쉬는 것만 빼고 박 전 대통령의 모든 걸 최씨 일가가 다 챙겨줬다는 것이다. (관련기사▶ ‘40년 우정의 비극’) 최순실이 내뱉었다는 “지가 아직도 공주인 줄 알아”라는 말은 박 전 대통령이 홀로서기에 실패했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그는 당 대표시절 ‘수첩공주’ 라는 별칭에도 거부감이 없었나 보다. 삼성동을 지키고 있는 그의 지지자들 입에서 “마마”라는 전근대적 호칭이 불쑥 튀어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웬만한 집안일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혼자 해결하는 편이다”
책에 적혀진 말이 사실이라면 삼성동 집 보일러 켜는 법을 모를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는 공대 출신이고 어머니가 고장 난 물건을 뚝딱뚝딱 고쳐내는 걸 내내 보고 자랐다.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일은 물론, 고장이 난 문손잡이도 드라이버를 사용해 덜그럭거리지 않게 나사를 조인다. 공구함만 잘 갖춰져 있으면 어렵지 않게 집안 곳곳을 손볼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그 사람이 맞나 싶다. 유감스럽게도 집안일은 남의 손을 빌려도 괜찮다. 최순실이 보내준 관리인이 처리하면 또 어떠랴. 하지만 나랏일은 비선을 통해 처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국민은 박근혜-최순실 공동정부에 표를 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작은 일이라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다”
어머니를 대신하던 시절, 그는 깐깐한 퍼스트레이디였다고 한다. “실시간으로 정확한 보고를 요구했고, 일단 보고를 들은 내용은 잘 처리되었는지 반드시 끝까지 책임을 물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도 전방의 안위를 살피고, 피습을 당했을 때도 선거를 걱정했다는 그였다. 그런데 ‘세월호 7시간’은 어찌된 일인가. 1072일 만에 처참한 모습으로 떠오른 세월호를 보며 온 국민은 분노와 슬픔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관련기사▶ ‘세월호 3년만에 뭍으로’). 그가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고 끝까지 책임을 물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아마 많은 일들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 깐깐함은 어이없게도 미르ㆍK재단사업에 어느 기업이 미적거리는지 체크하는 데, 자신의 검찰조서를 밤새워 살피는 데만 쓰여졌다. ‘나 자신을 위한 일은, 작은 일이라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라고 썼어야 맞을 것이다.
“국민을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이나 대통령이란 없습니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 그는 대연정을 제안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훈계 아닌 훈계를 했다. 그랬던 그가 1,500만 촛불 국민을 이겨볼 요량으로 스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파면 당했고 구속됐다(관련기사▶ ‘박근혜 31일 구속’). “법과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상식이 통하는, 그런 나라에서 살기를 소망한다”는 그의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몰락함으로써 가능해졌다. 대통령의 딸이었고 첫 여성 대통령이었던 그도 법 앞에선 한 사람의 국민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자서전에 적힌 대로 살았더라면 그는 지금 서울구치소가 아니라 청와대에서 남은 임기를 정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책은 중국, 대만 등에서 시차를 두고 잘 팔려나갔다. 그는 여전히 뉘우치지 않으니, 판매량에 비례한 부끄러움은 별 수 없이 우리 몫이다.
박선영 기자 philo9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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