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학력·장애 등 차별 행위
형사처벌·피해 구제 근거 없어
대선 앞두고 법안 논의 재점화
미국선 집단소송·징벌적 배상
기업들 부담 커 평등 문화 정착
반대 측 "표현의 자유 묵살"
법안 발의만 하면 항의 빗발
문재인·안철수 등 공약에 신중
뇌병변 장애가 있는 30대 여성 박민아(가명)씨는 지난해 초 장애인이 출산 과정에서 겪는 차별을 고발하는 언론 인터뷰에 응했다가 장애를 혐오하는 댓글을 보고 좌절했다. 포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에는 “(새로운) 폭탄을 안겨주면 폭탄 메우는 돈은 누가 내냐”, “태어날 아기가 불쌍하다” 등 장애를 혐오하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기 때문이다.
여성 장애인도 임신과 출산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던 박씨는 모욕적인 댓글이 차별적 행위라고 생각해 법의 구제를 받고 싶어 시민단체의 상담을 받았지만 한번 더 좌절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고 싶었지만, 인권위는 조사권은 있지만 수사권은 없어 비실명으로 댓글을 쓴 사람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수사기관에 고소하려고 해도 형법상 모욕죄 등이 성립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김재왕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형법상 모욕죄나 명예훼손죄는 특정인을 지칭해 혐오 표현으로 피해를 주면 성립하지만 장애 일반에 대한 혐오, 지역 혐오 등 특정 집단을 향한 혐오는 처벌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별, 학력, 지역, 장애여부 등에 대한 혐오 발언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각종 차별행위를 시정할 수 있도록 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10년간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이다. 대선을 앞두고 일부 후보들이 차별금지법 제정 필요성을 밝히고는 있지만 넘어야 할 산은 여전히 높아 보인다.
차별금지법은 사회적 약자가 고용, 교육, 재화·서비스의 이용 등에서 ‘합리적 이유’가 없는 차별을 겪을 때 피해를 구제하도록 하는 기본법적 성격을 갖는다. 조주은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차별을 시정하는 상징적 기관으로 인권위가 있지만 권고만 할 뿐 법적인 제재 효과는 없다”며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의 다양한 욕구를 법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선하려면 개별법을 포괄하는 기본법적 성격의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인권위가 발표한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에 따르면 성적소수자 94.6%, 여성 83.7%, 장애인 79.5%, 이주민 42.1%가 온라인에서 혐오표현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차별금지법을 옹호하는 측에선 “국가가 차별이나 혐오를 금지한다는 기본 입장을 갖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그 세부적 방안으로 “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도록 부추기는 증오ㆍ선동은 형사처벌이 가능하도록 하고, 일반적 차별표현은 인권위에 진정을 내고 피해 구제 받을 수 있도록 규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차별금지법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대부분에 있으며,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는 나치 찬양과 같은 증오ㆍ선동에 대해 형사처벌을 한다.
채용 및 인사 등에서 나타나는 근로 차별에 대한 시정도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주요 이유라고 전문가들은 꼽는다. 김영미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개별 기업의 입장에서는 (출산, 육아휴직 가능성이 높은) 여성근로자를 기피하거나 저임금 일자리로 채우는 성차별이 합리적 행동일 수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노동시장의 불평등이 저출산으로 이어지는 비합리적인 결과를 낳고 있다”며 “국가가 이를 차별로 보고 처벌해 실질적인 비용을 증가시키지 않으면 개선이 어렵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차별금지법에 따라 집단소송 및 징벌적 배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차별의 비용이 매우 커 기업이 자발적으로 인사관리부서를 만들고, 차별금지 및 적극적 조치를 취하는 인사관리전문가들을 채용하면서 성평등 근로 문화가 안착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에 대한 반대 목소리는 여전하다. 반대 측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아니어도 개별법으로 충분히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용태 변호사는 “예컨대 성소수자가 고용에 있어서 불평등을 겪고 있다고 하면 ‘성소수자 고용 불평등 개선법’을 만들면 되지만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측의 표현의 자유를 묵살할 위험이 있다”며 “상위 개념의 법은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대선주자들로서도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희정 충남지사,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 등은 모두 성 평등 사회를 지향하고 성차별을 해소하겠다고 공약했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은 시기 상조라며 한 발 빼는 모습이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심상정 정의당 의원 정도만 지지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한 의원실 관계자는 “19대 당시 법을 발의했던 김한길, 최원식 의원실뿐 아니라 법안에 찬성한 의원들에게 까지 항의전화가 빗발쳤는데 일상적 업무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며 “표를 의식해야 하는 상황에서 유력 주자들이 섣불리 차별금지법 카드를 꺼내들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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