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기, 남은 자들의 예의이자 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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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남은 자들의 예의이자 도리였다

입력
2017.03.30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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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였구나

전미화 글ㆍ그림

문학동네 발행ㆍ52쪽ㆍ1만2,800원

귀퉁이가 해진 기억 속의 벤치에 열다섯 시절의 공룡과 내가 나란히 앉아 있다. “아, 너였구나.” 친구가 웃는다. “기억해 줘서 고마워.” 문학동네 제공

그를 끌어내리자 그 배가 올라왔다. 거짓말처럼. 그 배는 단번에 우리의 시간을 3년 전으로 돌려놓았다. 마땅히 우리를 그때처럼 아프게 하면서, 놓쳐 버릴 뻔했던 진실을 찾는 희망 또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런데 그 배는 왜 3년 동안이나 바다 속에 잠겨 있어야 했을까? 그럼에도 그 배는 어떻게 끝내 떠오를 수 있었던 걸까?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그림책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 본다.

어떤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어느 날, 공룡 한 마리가 ‘나’를 찾아온다. “안녕! 오랜만이야!” 공룡은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태연히 내 방에 짐을 푼다. “방이 그대로네?” 그렇게 시작된 동거. 공룡은 잘 먹고 잘 자고, 코 골고 이 갈고 방귀 뀌며 잠도 잘 잔다. 영화관에서 시답지 않은 장면에 낄낄대거나 눈물을 쏟아 나를 창피하게 하고, 탁구를 칠 땐 처음 친다면서 나를 열패감에 빠뜨리며, 목욕탕에서는 엄청난 때로 내 팔을 아프게 한다. 당혹에 겨운 나는 급기야 묻는다. “너… 누구야?” “나… 정말 몰라?”

토라진 공룡은 밥도 먹지 않고 하염없이 앉아 있기만 한다. 나는 무슨 잘못을 한 걸까. 기분을 풀어 주러 간 놀이공원에서 공룡이 말한다. “잊혀지는 게 힘들까, 잊는 게 힘들까?” 나는 대답이 없고 공룡은 말을 잇는다. “있잖아, 우리 마을 공룡들은 언제나 여행을 떠날 수 있게 준비해 둬. 여행을 갈 수 있는 건 행운 중에서도 최고의 행운이야. 가끔은 여행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고 가슴이 떨려. 그리운 것들이 생각나거든.” 그리고, “여행의 시작은 기억이야.”

그제야, 흩어지고 멈추는 순간들 속에서 나는 떠올린다.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나만 어른이 되었던, 친구! 귀퉁이가 해어진 기억 속의 벤치에 열다섯 시절의 공룡과 내가 나란히 앉아 있다. “아, 너였구나.” 친구가 웃는다. “기억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오랜만에 여행할 수 있었어.” 웃음을 남기고 친구는 떠났다. 나는 생각한다. ‘친구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으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책을 덮고 나도 생각한다. 기억과 망각 사이에 무엇이 있는 걸까? 무엇이 옛 인연을 공룡처럼 낯설게 하고, 그럼에도 그 사람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걸까? 우리는 왜 저 아득한 행성으로 떠나 보낸 이들을 이따금 저마다의 방으로 불쑥 불러들이는 걸까? 그가 잊힌들 존재하지 않는 그는 아플 수 없고, 그를 기억한들 가 버린 그는 다시 돌아올 리 없는데.

죽어 떠난 이 돌아올 리도 아플 수도 없으므로, 이 그림책의 이야기는 살아남은 자가 죽어 떠난 이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예의와 도리를 점검하는 시뮬레이션에 다름 아니다. 예의와 도리는 종종 밥보다도 더 굳건하게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유한한 생명이면서 동시에 영원한 이름이니까. 인간다운 인간은 안온한 밥으로 영원한 이름이 부끄러워지는 것을 견딜 수 없으니까.

그랬다. 그를 끌어내리고 아득한 바다 속의 그 배를 끝끝내 물 밖으로 불러낸 것은, 멀쩡히 눈뜬 채 차디찬 물속으로 떠나 보낸, 그 배의 아이들을 잊는 것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는, 수많은 이름들의 예의와 도리였다. 떠나간 친구를 잊는 것이 미안했던 책 속의 한 이름이, 아득한 행성의 공룡을 제 방으로 부른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김장성 그림책작가ㆍ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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