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청산 대신 적폐와 함께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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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청산 대신 적폐와 함께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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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3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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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이 30일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강상중 지음ㆍ노수경 옮김

사계절 발행ㆍ184쪽ㆍ1만1,500원

아마 노무현 정부에 대한 아쉬움이었던 것 같다.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제도와 시스템 따윈 내팽개치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내걸고 4대 권력기관 검찰, 경찰, 국세청, 국정원을 현명(!)하게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 말이다. 이는 요즘도 이어진다. 한마디로 이래 가지고서 ‘적폐청산’이 되겠느냐는 비판들이다.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은 이 문제에 비춰볼 만한 책이다. 저자는 재일동포로 도쿄대 교수와 세이가쿠인대 총장을 거쳐 지금은 구마모토현립극장 관장으로 있는 강상중. 저자는 “그 놈들은 악, 우리는 선”이라 손 쉽게 경계선을 긋지 말라고 강조한다. 선을 그으면 “악의 문제에서 쉽게 빠져 나와 자신들만의 평온한 세계를 지키는 일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도 저런 방법을 쓰면 어떨까라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소설, 영화, 드라마 속 절대적 악이 보여주는 카타르시스가 기대고 있는 건 그 지점이다.

그래서 저자가 강조하는 건 악이란 게 알고 보면 대단한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헛된 공허함뿐이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악이란 선으로 도움닫기 하기 바로 그 직전의 상태라고 설명한다. 그러니 선과 악은 전혀 다른 기반이 아니라 같은 땅을 딛고 서 있다. 저자는 성경,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그레이엄 그린의 ‘브라이턴 록’, 토머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등 여러 작품들을 그만의 방식으로 읽어내려 가면서 이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악의 뿌리는 내가 더 이상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는, 이 세상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당혹감이다. 이 불편함이 극단으로 치닫다 신앙에 도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버리기로 결심한 것이 악이다. 뛰어넘지 못한 선, 주저앉아버린 선이 악이다. 그래서 악의 정체는 뛰어넘지 못한 자, 주저앉아 버린 자의 자기혐오다.

저자는 탈출구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세간(世間)을 제시한다. 세간이란 우리로 치자면 ‘때묻은 현실’’이다. 세상을 버릴 게 아니라 어찌됐건 세상을 껴안고 비벼대야 한다. “혁명적 로맨티스트는 세간을 무시하고 모멸합니다. 세간 따위는 단순한 질곡에 지나지 않으니 언급할 필요도 없다며 멀리 내던지고 고매한 이상만을 이야기하고 싶어하지요. 자연주의 문학도 마찬가지로 세간을 원수처럼 취급하며 자신이 독을 품은 세간의 이빨에 얼마나 크게 상처입었는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는 일종의 로맨티시즘으로 결국은 악에 귀결되고 맙니다.”

한국판 제목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은, 그래서 원제 ‘악의 힘’에 비해 약간 통쾌함 쪽으로 기운 듯한 느낌이다. 국정농단과 탄핵을 염두에 뒀을 게다. 그러나 책의 메시지는 악의 매력을 과대평가하지 말 것이며, 과잉된 악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쪽이다. 하기야 뭔가 대단한 것처럼 보였던 국정농단이라는 게 알고 보니 얼마나 비루한 것들이었던가. 하여 한국판 제목은 ‘악과 함께 사는 법’이 어떠했을까 싶다. 적폐청산, 그리고 마키아벨리즘의 유혹이 넘실대는 시대, 우리는 마지막 로맨티스트이고 싶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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