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잔, 식사 한끼도 사치”

이전기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커피 한잔, 식사 한끼도 사치”

입력
2017.03.30 04:40
0 0

“아침 7시~밤 11시 공부만해야”

“앞 안보이지만 멈출 수도 없고”

불안한 미래에 마음 쪼그라들어

“커피 먹지마, 펜 딸깍 거리지 마”

서로 견제^비하하는 포스트잇도

500원 노래방서 스트레스 풀고

합격했다 속이고 거짓 출근도

공시족 70%가 자살생각 위험군

24일 서울 노량진 공시촌의 한 식당 앞. 류효진 기자

23일 오전 6시, 시끄러운 휴대폰 알람을 들으며 3평 남짓 서울 노량진 고시원에서 일어나는 이모(28)씨. 오늘도 선착순 수업이다. 오전 7시 수업에 좋은 자리를 잡으러 옷만 대충 입고 집을 나선다. 학원까지는 걸어서 8분. 길에는 벌써 공시생들이 잰 걸음을 걷고 있다. 이씨의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진다.

다음 시험은 4월 8일. 열흘 남짓 남았다. 이씨는 2015년 8월부터 1년 8개월째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족이다. 충남대를 졸업하고 집에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했지만 거듭된 낙방에 지난해 10월 상경해 노량진 공시족이 됐다. 혼자 시험 준비를 하면 아무래도 자기관리가 어렵다. 그래서 SNS에 ‘공시생’ ‘공시생일기’를 태그한 사람끼리 친구를 맺고 기상시간, 하루 공부시간을 공유하는 이들도 있다. 지방에서 인터넷 강의로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최모(26)씨는 “혼자 공부하면 시간관리가 힘든데 서로 지켜봐 주니 나태해지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노량진에선 학원을 통해 시험에 대비할 수 있다는 게 일단 안심이지만, 한편으론 경쟁자가 이렇게 많고,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이 엄습한다. 9급 시험을 준비 중인 심모(28)씨는 “노량진에서 학원을 다니는데 보면 사람들 표정이 어둡다. 9꿈사라는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댓글들이 엄청 달린다. 불안이 많고 미래에 대한 기약이 없다는 거다. 나도 오래 있으면 똑같이 좌절하고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족이 같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다른 공시족에게 보낸 포스트 잇 쪽지. 1월 31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와 논란이 됐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지난 1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올라 화제가 됐던 포스트잇 사진은 예민한 공시족의 심리상태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매일 아침 저가 커피를 사들고 학원에 온 한 공시생에게 다른 공시생이 “매일 커피 사 들고 오시는 건 사치 아닐까요? 같은 공시 수험생끼리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느껴져서요”라는 메모를 책상 위에 붙여둔 것이다. 공시생들끼리 서로 비교하고 비하하며 예민해하는 이런 포스트잇은 공시촌 특유의 문화가 됐다. 이씨도 “책장 좀 살살 넘겨라” “펜 딸깍딸깍 소리내지 마라”는 포스트잇을 받아봤다. 이씨는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묘한 질투심이 생겨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아침식사는 대부분 편의점 삼각김밥에 생수다. 때로는 삶은 달걀이나 컵라면, 도시락을 먹는다. 시간과 돈을 아끼기 위해서다. 점심과 저녁은 학원 근처 한식뷔페 형 고시식당에서 한달 권을 끊어 먹는다. 한 끼에 3,900원 꼴이어서 다른 식당보다 싸다. 신림동 공시족 구모(31)씨는 “아침에는 할인이 더 돼서 그냥 고시식당에서 세 끼 다 먹는다”며 “아낄 곳에서 조금이라도 아껴야 한다”고 말했다.

고시원 카스트. 월세 액수에 따라 샤워시설과 화장실 유무가 결정된다. '2017 진입경로별 공시준비 청년층 현황 및 특성 연구보고서' 중

시험준비 기간이 길어질수록 공시족들의 마음은 더욱 쪼그라든다.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이씨는 나이를 먹고 부모님께 손 벌리는 게 부끄럽다고 말했다. “생활비를 매달 보내주시는데, 나이 들어 뭐하나 싶은 마음이죠.” 이씨가 지난 1년 반 동안 쓴 돈은 1,500만원 정도. 그나마 화장실은 없고 샤워실만 있는 ‘샤워룸형 고시원’에서 살아 생활비를 아꼈다. 하기야 평균적인 공시족의 모습이다. 이씨는 지금껏 한번도 어머니께 노량진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드린 적이 없다. 이씨는 “어머니가 한번 올라오시겠다고 하는데, 기어코 말렸다. 제가 사는 모습 보여드리기가 싫다”고 한숨을 쉬었다.

사법시험 등 다른 국가고시 준비생도 시간과 돈에 쪼들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특히 공시족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은 1.8%의 합격률 아래에서 이 생활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막연함이다. 몇 년째인지 모를 ‘공시낭인’ ‘공시도사’들의 존재가 그 불안감을 확산시킨다. 5급과 7급 시험을 준비 중인 김모(32)씨도 5년째 노량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부모님이 “올해는 꼭 돼야지”라며 압박하는데, 그럴수록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부모님의 기대가 뒤엉켜 공부하기가 더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필기시험에 붙고 2차 면접에서 고배를 마신 경험을 한 뒤론 곧 될 것 같은 마음에 포기를 못했고, 이제는 나이가 많아 민간 기업은 갈 수도 없다. 그는 “앞이 안 보이는데 이제 와서 멈출 수도 없다”며 꽉 막힌 현실을 토로했다.

공부할 시간은 부족하고, 경제적으로는 쪼들리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스트레스는 치솟는다. 친구나 가족도 잘 안 만나는 공시족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고작 코인 노래방에서 500원에 노래 3곡을 부르는 정도다. 카페에 가서 4,000여원짜리 커피를 사 마시는 사치를 부리는 이도 있다.

서울 노량진 공시촌의 거리 풍경. 류효진 기자

서울 동작구 마음건강센터가 2014ㆍ15년 관내 공시족 120명을 검진한 결과 70%인 84명이 우울증 및 자살생각 위험군으로 분류됐다. 실제로 지난 23일 경찰 시험을 준비하던 30대 공시족이 스스로 채점한 시험지를 곁에 두고 야산에서 목숨을 끊었다. 지난해 1월, 천안 모텔에서 숨진 채 발견된 30대 A씨는 ‘공무원에 붙었다’며 가족들을 속인 채 1년 간 거짓 출근을 하기도 했다. 이씨는 “나이가 서른 근처 되면 준비기간 1년 반만 넘어가도 누구나 살기 싫다는 생각을 한번쯤 한다. 이 공부를 계속 해도 되는 걸까 하루 종일 생각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공부해야 시험에 붙는다는 ‘14시간의 법칙’(식사시간 제외)이 유령처럼 떠도는 공시촌. 오늘도 공시족들은 한없이 쫓기는 하루를 마무리하며, 한번쯤 책상에 걸어놓는다는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에 나오는 문구를 되뇐다.

‘‘너는 말이다. 한번쯤 그 긴 혀를 뽑힐 날이 있을 것이다. 오늘도 너는 열 여섯 시간 분의 계획을 세워놓고 겨우 열 시간 분을 채우는 데 그쳤다. 이제 너를 위해 주문을 건다. 남은 날 중에서 단 하루라도 그 계획량을 채우지 않거든 너는 이 시험에서 떨어져라. 그리하여 주정뱅이 떠돌이로 낯선 길바닥에서 죽든 일찌감치 독약을 마시든 하라.’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공시족 어휘 사전.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공시족 이야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