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경제 최지윤] 그저 허세 가득한 배우일 줄 알았다. 낯가리고 질문하면 단답형으로만 대답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누구보다 세심했고 배우로서 가치관도 뚜렷했다. '씩' 웃을 땐 연쇄살인마 모태구의 모습이 언뜻 겹쳐 보였다. "아직 여운이 남아있다"고 했다. OCN 종영극 '보이스'에서 열연을 펼친 배우 김재욱이다.
사이코패스 연기를 했는데 의외로 '섹시하다'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얼떨떨하다. '섹시한 사이코패스가 돼야지'하고 연기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태구의 매력보다 좋게 평가해줘서 감사하다. 요즘 인기를 실감한다. 밖에 밥 먹으러 다니면 많이 알아보더라. '보이스'를 하기 전과 후는 확실히 달라졌다."
'보이스'는 범죄 현장 골든 타임을 사수하는 112신고센터 대원들의 치열한 기록을 그렸다. 김재욱은 '보이스'의 최대 수혜자로 떠올랐다. 희대의 살인마로 변신, 미친 존재감을 뽐냈다. 분량이 많지 않았지만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이미지도 제대로 각인시켰다. "기분 좋다. (연기는) 설득하는 게 아니고 증명하는 거니까. 많은 사람들이 좋게 평가해줘서 보람차고 뿌듯하다. 엄청 바쁘게는 아니지만 꾸준히 배우의 길을 가고 있던 사람이다. 관심 있게 지켜봐 줘서 감격스럽다. 앞으로 작품을 하는데 있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만난 김재욱은 모태구보다 훨씬 매력이 넘쳤다. 어떨 땐 시크하면서 섹시했고, 수다쟁이 같은 면모도 엿볼 수 있었다. '머리는 왜 기르냐'고 묻자 "기르는 게 아니라 내버려두는 것"이라며 "필요 없으면 그냥 둔다"고 답했다. 순간 오싹해져서'더 물어보면 죽는 거 아니냐'고 하자 씨익 웃었다. 김재욱은 연쇄살인마로 변신하기 위해 트레이드마크인 긴 머리를 잘랐다. 태구의 외향을 설정하는데 자신이 "의견을 많이 내지는 않았다"면서도 "기본적으로 머리는 길면 안 될 것 같았다. 대신 슈트를 입고 머리를 올려도 빈틈이 없어 보이고 싶었다. 아무도 이 사람을 쉽게 생각하지 못하고, 조금 두려워할 수 있는 지점이 있었으면 했다"고 털어놨다.
모태구는 12세 때 아버지 모기범(이도경) 성운통운 회장이 경쟁사 사장을 죽이는 모습을 목격하고 사이코패스의 길을 걷게 됐다. 이런 설정은 후반부가 돼서야 밝혀졌다. 김재욱 역시 "태구의 성장과정 등은 모르고 연기를 시작했다. 히스토리를 만들고 접근하지 않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악인, 일말의 동정이 필요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고 귀띔했다.
모태구의 손에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무진혁(장혁)의 아내와 강권주(이하나)의 부친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심춘옥(이용녀) 할머니와 성운시 최고급 유흥업소 장마담(윤지민) 살인 장면도 끔찍했다. 김재욱은 가장 힘들었던 장면으로 신춘옥 할머니 살해 신을 꼽았다.
"이옥녀 선배가 워낙 연기를 잘했다. 그 신을 찍으면서 나도 이런 에너지를 줄 수 있는 배우가 돼야 하는데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장면에서는 딱히 내가 연기를 한 게 없다. 다 리액션이다. 이옥녀 선배가 모든 걸 던져줬다. 그렇게 연기한 경험이 오랜만이다. 그 신 찍고 나서부터 태구 캐릭터가 좀 더 구체화됐다. 감사했다."
김재욱 하면 아직도 10년 전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꽃미남 이미지를 버리고 악역으로 변신하는데 걱정은 없었을까. 살인을 통해 희열을 느끼는 사이코 역에 선뜻 도전하기 쉽지 않았을 터. 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호기심이 강했다. 잘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며 "'보이스'에 출연한 건 모태구라는 인물의 매력도 있지만, 처음 받았던 4부까지 대본이 가장 컸다. 정말 재미있었다. 글로 보는데도 긴장감,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멈춰지지 않더라. 그만큼 상황에 대한 묘사가 잘 돼 있었다. 훌륭한 작품에 꼭 출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모태구는 8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대사가 없었다. 인물을 구체화 시키는데 아무래도 에러 사항이 있지 않았을까. 김재욱은 시청자 입장이 돼 매주 '보이스'를 챙겨보며 가상의 도시 성운시가 구축되는 걸 살펴봤다. 그러면서 점점 태구에 몰입할 수 있었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를 참고했다. 크리스찬 베일이 상류층의 삐뚤어진 감성이나 행위를 어떻게 표현했나 다시 찾아봤다. 살인행위를 떠나 기본적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주변 인물도 살펴봤다"고 짚었다.
'주변에서 본인이 범인인 걸 알더냐'는 질문에 "보자마자 다 알더라. 뒷모습이 너더라. 입이 너다. 다 알았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어 "시청자들이 심대식(백성현) 등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의심할 때 잘 됐다 싶더라. 쉽게 밝혀지면 재미없지 않냐. 시청자들이 추리해간다는 건 그만큼 작품에 관심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모태구와 비슷한 점에 대해서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굉장히 조심스럽고 어려운 질문"이라며 한참을 침묵하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없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얘기하기도 애매하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불필요한 충돌은 가능한 피한다. 확실히 맞붙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순간에는 그러지 않는다. 다른 점은 오만함, 우월감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관계를 피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 대화 나누고 생각 공유하는 거 좋아한다. 말하면서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네(웃음)."
김재욱에게 '보이스'는 오래 기다린 작품이다. 아직도 하고 싶은 캐릭터가 "정말 많다"며 배우로서 욕심을 드러냈다. 태구 보다 악한 인물이 제안 와도 "크게 피할 생각은 없다"며 "행위가 같을지언정 그 행위에 다다르는 목적이 다르면 완전 다른 얘기가 되지 않냐. 그러면 살인을 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다"고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김재욱의 첫 인상은 차가워 보였지만 말할수록 따뜻한 감성이 느껴졌다. 이하나가 "김재욱은 세심한 배우"라고 칭찬한 데 대해 고개가 끄덕여졌다. 오히려 제작진과 다른 배우들이 자신을 모태구로 경계해 "외로웠다"고 했다. 장혁, 이하나, 백성현 등 다른 출연진을 촬영장에서 만나면 "반가워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싶었다. 날 경계하는데 이해하는 반, 떠들고 싶은 마음 반 이었다"고 덧붙였다.
김재욱은 2002년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로 데뷔했다. 어느덧 15년 차 베테랑 배우다. 작품 사이 기간이 꽤 있는 이유에 대해 "뭐…좋은 작품을 못 만난 것"이라며 "공백기 때는 잘 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올해 계획을 묻자 바로 "없는데요"라고 웃었다. 그런데도 매력이 넘쳤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계속 궁금한 배우!" 더욱 궁금해졌다. 사진=더좋은이엔티 제공
최지윤 기자 plain@spor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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