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표 내놓고 내 레이스에서 꺼져!(Get the hell out of my race and give me those numbers.)”
50년 전 한 여성 마라토너가 42.195km 풀코스 레이스 도중 대회 관계자에게 뒷덜미를 잡히며 이 같은 폭언을 들었다. 불과 33년 전까지만 해도 올림픽에서 42.195km는 남성들에게만 허락된 거리였다. 당시 스무 살 캐서린 스위처(70ㆍ미국)가 출전했던 1967년 제71회 보스턴마라톤 대회는 남자들만이 달릴 수 있는 ‘성역’이었다. 미국 스포츠 매체 ESPN은 27일(한국시간) 캐서린 스위처의 보스턴마라톤 출전 50주년을 맞아 그의 도전을 재조명했다.
여성에게 마라톤을 금지한 이유는 간단했다. ▲다리가 굵어지고 ▲가슴에 털이 날 수 있으며 ▲자궁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따라서 여성에게 허락된 올림픽 육상 최대거리는 단 800m였다. 남성과 같은 거리를 달리고 싶어 하는 투쟁의 역사는 120여 년 간 계속됐다.
최초의 투쟁은 비공식적으로 시작됐다.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서 멜포메네는 대회 조직위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자 선수들과 함께 달렸다. 진행요원의 저지로 경기장에 들어가는 게 제지되자 트랙 대신 경기장 밖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4시간 30분의 레이스를 마쳤다. 여성들의 도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마라톤축제인 보스턴마라톤으로 이어졌다. 1966년 제70회 보스턴마라톤에서는 로베르타 깁이 번호표를 달지 않고 출전했다. 역시 출발선 근처 숲에 숨어 있다가 출발신호와 함께 다른 주자들 틈에 끼어 달리는 ‘번외 경기’였다.
대학생이던 캐서린 스위처는 로베르타 깁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듬해 보스턴마라톤 출전을 결심한다. 그녀가 다른 여성 참가자들과 달랐던 점은 마라톤에서 자신의 여성성을 마음껏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도전자들은 가발을 쓴 채 남장을 하거나 가명을 쓰고, 심지어 두꺼운 스웨터를 껴입는 등 자신이 여성임을 숨긴 채 달렸다. 그러나 캐서린은 1967년 4월 보스턴마라톤 대회에서 귀걸이를 달고 립스틱을 짙게 바른 채 출발선에 섰다. 립스틱을 지우는 게 어떠냐는 주위의 조언에도 “절대 지우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캐서린은 운 좋게 번호표까지 발급받아 보스턴마라톤 최초의 ‘공식 여성 참가자’가 될 수 있었다. 당시 보스턴마라톤 대회 참가 신청서에는 성별을 적는 란이 없었다. 남성들만 출전하는 것이 당연시 됐기에 성별 표기의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캐서린은 ‘KV Switzer’라는 중성적 이름으로 마라톤에 등록해 정상적으로 번호표를 받을 수 있었다. 훗날 캐서린은 대회 등록명에 대해 “조직위원회를 오도하려는 의도가 아닌 대학 논문에 서명하는 습관이었다”고 설명했다. 덕분에 발급받은 그녀의 번호표 261번은 지금까지 여성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쓰인다.
캐서린이 6km를 통과할 즈음, ‘여자’가 뛰고 있다는 사실이 대회 조직위원회에 알려졌다. 조직위원장 조크 샘플이 ‘살기’를 띤 얼굴로 캐서린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낚아챘다. 그는 “번호표 내놓고 내 레이스에서 꺼져”라고 소리쳤다. 그녀와 동행한 코치 어니 브릭스와 애인 톰 밀러가 조크 샘플을 저지해 마침내 캐서린은 4시간 20분의 기록으로 피투성이가 된 발과 함께 완주에 성공한다.
캐서린의 ‘도발’에 면죄부를 준 건, 한 장의 사진이었다. 주자에게 달려드는 대회 관계자와 이를 피해 달리는 여성의 사진은 ‘여성의 달릴 자유’에 대한 공론화 계기가 됐다. 결국 여론의 지지를 받아 철옹성 같았던 풀코스 출전 금녀의 문이 활짝 열렸다. 4년 후 1971년 제2회 뉴욕마라톤에서 세계 최초로 여성 참가가 허용됐다. 이듬해에는 보스턴마라톤도 여성 참가를 허용했고, 1974년에는 여자부를 신설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84년 마침내 LA올림픽에서 여자마라톤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그리고 사진은 미국 라이프(Life)지에서 ‘세상을 바꾼 100장의 사진’ 중 하나로 선정됐다.
하지만 캐서린에게 진짜 시련은 따로 있었다. 여자 마라톤이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이후에도 사람들은 ‘여자가 해 봤자 얼마나 잘하겠냐’는 의문을 거두지 않았다. 1970년 보스턴마라톤에 다시 출전한 그는 이후 8년 동안 쉬지 않고 마라톤에 출전했다. 1975년 보스턴마라톤에서 캐서린은 2시간 51분 37초의 기록으로 리안 윈터(독일ㆍ2시간 42분 24초)에 이어 여자부 2위로 결승선을 통과한다. 미국에서 세 번째이자 세계 6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그는 대회 이후 “내 달리기를 ‘조깅 수준’이라고 무시하는 말들이 나를 화나게 했다”며 “운동에 재능이 없지만 반격을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고 말했다.
세계 각국의 여성들이 캐서린에게 “261(캐서린이 보스턴마라톤에서 달고 뛰었던 번호)이 나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 결과 2년 전 전 세계 여성 달리기를 지원하는 자선단체 ‘261 fearless’가 탄생했다. 이 단체는 특히 아프리카 여성들의 달리기를 집중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캐서린이 50년 간 지속해온 여성권리 증진 운동의 결과물이다.
“세 걸음 앞으로 전진하지만 두 걸음 후퇴했다.”
50년 인생을 여성 마라톤에 헌신한 캐서린 스스로의 평가다. 올해 일흔 살이 된 그는 오는 4월 다시 보스턴마라톤에 출전할 계획이다.
*참고
오수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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