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3.29
1967년 1월 생 남현섭씨가 한양대를 중퇴하고 곧장 산업 현장에 투신한 이유를 단정적으로 말할 순 없다. 다만 그가 대학을 다닌 80년대 중ㆍ후반은, 상대적으로 쉬운 대졸 취업의 길을 마다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고자 공장에 취업하는 이들이 없지 않던 때였다.
25세이던 1992년 그는 작업 도중 손가락 넷을 잃고 산업재해 장애인이 됐다. ’산업재해노동자연맹(1987)’과 ‘산업재해노동자회(1988)’가 통합해 1990년 출범한 지금의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산재노협)’가 그의 산재 보상 상담 등을 도왔다. 산재노협이 하는 주된 일이 산재 예방 교육 홍보, 치료ㆍ재활ㆍ보상 상담, 산재노동자 노동권 확보 투쟁 등이다. 남현섭씨는 재활치료를 받으며, 노동인권ㆍ환경을 맨 밑바닥에서 떠받치는 산재노동자 권익운동을 시작했다. 서울 구로 산재노협 상담부장(2001~2007), 인천 산재노협 상담ㆍ사무국장(2007~2014). 그는 산재 전문가가 됐다.
산재노협 소식지 ‘건강한 노동세상’ 30호에 그는 장애인 노동자이자 활동가인 그가 꿈꾸는 결혼에 대한 글을 썼다. “먹고 살 만큼만 일해서 벌고 내 반쪽이랑 신나게 여행도 다니고 욕심 없이 살면서 옥신각신 싸우기도 하며 즐겁게 사는 것.” 40대의 그는 자신의 “소박한 꿈”을 동료 장애인 노동자들과 공유하고자 했다. 그리고 얼마 뒤인 2011년 말 그는 그 꿈을 이뤘다. 베트남 여성과 결혼, 두 아이를 낳은 그는 2012년 9월 소식지에 “부모는 팔불출이 맞나 보다. 보고만 있어도, 똥 싸는 모습도, 쉬하는 모습도 왜 이리 예쁜지….”라고 썼다.
인천 산재노협은 회장ㆍ사무국장 2인체제로, 사무실 운영비와 월급을 회원 후원금으로 충당해왔다. 남현섭씨는 2014년 말 산재노협을 나왔다. 월급을 못 받을 형편이었고, 그는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는 2016년 3월 29일 오전, 새로 일을 시작한 경기 시흥의 한 영세 폐스티로폼 파쇄공장에서 기계에 손이 빨려 드는 사고로 숨졌다. 그를 삼킨 기계에는 산업안전보건법(제33조 2항)이 규정한 안전장치, 즉 ‘동력기계 회전부 덮개’도, 비상 정지장치도 없었다.
누구 못지않게 관련법을 잘 아는 산재 전문가였지만,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의 그는 영세 사업장의 준법을 강하게 요구할 수도 없는 힘 없는 장애인 노동자일 뿐이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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