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이 구설수에 올랐다. 입심 좋은 그는 3ㆍ1 운동을 드라마틱하게 설명하려다 ‘룸살롱 태화관에서 낮술을 먹었다’, ‘마담 주옥경하고 손병희가 사귀었다’, ‘33인 지도자 대부분 나중에 변절했다’라고 했는데, 그게 문제가 됐다. 그는 전가의 보도인 ‘역사 해석의 자유’를 내세우고 있으나, 3ㆍ1운동 관련 단체들은 수긍하지 않는 눈치다. 결과가 궁금하다.
곧 이어 재독 철학자 한병철도 입길에 올랐다. 2012년 ‘피로사회’ 이후 10여권의 저서가 번역,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었던 학자다. 그는 지식인들의 마르지 않는 샘 ‘신자유주의 세계화’ 때문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일그러졌느냐는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해 화제를 모았다. 그런 그가 출판사가 마련한 강연회에서 지각은 기본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피아노 연주에 횡설수설과 관객모독까지 했던 모양이다. 강연 뒤 출판사는 사과문을 내놨다.
‘거봐,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말로 흥한 자 말로 망한다니까’처럼 드디어 때를 만났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이리저리 쏟아지는 비판에 숟가락 하나 더 얹을 생각은 없다. 설민석과 한병철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친 평가를 반복하고픈 생각도 없다.
다만 이 소동 덕에 지난 주말, 간만에 꺼내 든 책 하인츠 슐라퍼의 ‘니체의 문체’ 얘길 좀 하고 싶다. 니체에 대한 논란 가운데 하나는 ‘그가 말한 초인이 결국 히틀러였느냐’하는 문제일 테다. 수준 낮은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찬양자들은 니체의 시적 문장에 홀라당 빠져 그를 무오류의 존재로 못 만들어 안달이고, 비판자들은 그가 쓴 문장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며 그의 더러운 마초 본성과 여성혐오를 입증할만한 문구와 문장들을 추출해내는 일에 열심이다.
슐라퍼는 이 논란 사이에서 다른 문제를 건드린다. 바로 문체, ‘도취된 문장’ 그 자체다. 설민석의 강연 동영상을 재미있게 봤다면, 늦은 저녁 한병철의 책을 낄낄대며 읽어댔다면 어째 벌써부터 감이 좀 오지 않는가?
슐라퍼가 니체에게 주목하는 건 ‘내용’이 아니다. 그보다는 니체 특유의 격렬한 문체다. 이토록 강렬한 문체가 보여주는 건 글의 구조나 논리가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는 저자다. 문장을 뚫고 제 얼굴을 내밀고야 마는 저자는 일종의 신화가 된다. 그것도 이 혼탁한 세상에 홀로 고고한 ‘고독한 방랑자의 신화’일 경우가 많다. 자의식에 목마른 이들은 이런 문체에 열광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독자는 동료 시민으로서 그 언어를 듣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추종자로서 그 언어의 부름을 받는다.” “독자는 자기가 읽은 것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말한다고 믿게 된다."
슐라퍼가 이런 니체와 대조하는 건 브레히트의 언어다. 브레히트는 니체 식의 격렬한 문체를 포기했다. 중요한 건 문체가 아니라 내용이라 봤다. 그래서 문체는 극히 소박해진다. 소박한 문체란 아주 차분해져서 사람들은 그것이 일종의 문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기까지 한다. 뒤집어 보자면 “문체에 대한 포기 그 자체가 문학적 행위이자 문체적 시위”인 셈이다.
이런 대조를 통해 슐라퍼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민주주의다. 나치즘의 광기와 그것을 떨쳐낸 전후 독일의 민주주의적 성취란, 결국 ‘니체 식의 도취된 문장’과 뒤이은 ‘브레히트 식의 소박한 문장’으로도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니체가 히틀러에게 기여했다면 ‘초인’이나 ‘여혐’이 아니라 ‘문체’로써 그리 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되물어야 질문은 결국 ‘독일인들은 왜 그토록 도취된 문장에 열광했는가’일 게다. 마찬가지다. 설민석과 한병철 문제에서 봐야 할 것은 개개인의 특성, 그 날의 컨디션이 아니라 결국 왜 우리는 그처럼 도취된 언어에 열광하는가일 게다. 살펴봤듯 언어의 내용을 떠나, 도취된 언어에 취약한 사회는 민주주의가 취약한 사회라 할 수밖에 없다. 저마다 온갖 뜨거운 언어들을 내놓는 대선을 앞둔 우리에게 하나의 포인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엔 격렬하고 화려하기보다는, 심심하고 재미없으되 견고한 언어를 요구해 보는 건 어떨까.
조태성 문화부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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