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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영의 성장사를 보여주는 작품 4

입력
2017.03.26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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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영표 걸크러시의 결정판 ‘힘쎈여자 도봉순’의 한 장면. JTBC 제공
박보영표 걸크러시의 결정판 ‘힘쎈여자 도봉순’의 한 장면. JTBC 제공

‘도봉순의 핵주먹에 한 대 맞아보고 싶다.’ JTBC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을 보고 있으면 악당을 자처해서라도 도봉순(박보영)의 활약을 더 가까이에서 응원하고 싶어진다. 도봉순은 우리 시대의 슈퍼히어로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괴롭히고 무시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위협하는 세상을 향해 통쾌한 어퍼컷을 날린다. 동네 불량배들을 개과천선시키고 폭력조직까지 일망타진한 도봉순의 핵주먹은 이제 여성 연쇄 납치범과의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

‘도봉순 파워’는 배우 박보영으로 인해 위력이 한층 강해진다. 박보영은 드라마 속 도봉순이 그러했듯, 자신을 귀엽고 사랑스러운 ‘국민 여동생’ 이미지로 바라보는 시청자들을 기분 좋게 배반한다. 안전한 이미지에 안주하는 대신 그 이미지를 비틀어 자신을 증명하는 선택을 했다. 자신의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자각해가며 성장하는 도봉순에게서 박보영의 성숙을 발견하게 된다. 박보영이 도봉순이 되기까지, 박보영의 성장사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을 골라봤다.

할아버지 차태현(왼쪽부터)과 엄마 박보영과 아들 왕석현이 진짜 한 가족처럼 닮았다. 영화 ‘과속스캔들’의 한 장면.
할아버지 차태현(왼쪽부터)과 엄마 박보영과 아들 왕석현이 진짜 한 가족처럼 닮았다. 영화 ‘과속스캔들’의 한 장면.

‘과속스캔들’(2008)

관객 820만 명을 동원하며 박보영에게 국민 여동생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준 작품.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 캐릭터는 여동생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고등학교 때 사고를 쳐 여섯 살 아들을 둔 스물두 살 미혼모 황제인.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아빠 남현수(차태현)의 집으로 무작정 아들을 데리고 쳐들어가 ‘알박기’를 할 만큼 당차고 강단 있다. 한물 간 가수지만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인지라 스캔들이 두려웠던 현수는 딸과 손자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세 사람은 좌충우돌 동거를 시작한다.

피를 물려받아 노래 실력이 출중한 제인은 현수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노래대회에 출전한다. 자신을 감추려는 아빠에게 “미혼모도 하고 싶은 것 많다”고 당돌하게 대드는 제인의 목소리가 뜻밖에도 울림을 준다. 꿈도 많고 사랑도 하고 싶은 보통의 스물두 살이면서 아빠에겐 인정 받고 싶은 여린 딸이고 아들에겐 헌신적인 엄마인 제인의 여러 면모를 박보영은 야무지게 소화해냈다. 박보영을 위해 연기했다는 차태현과 ‘썩소’가 매력적인 아들 왕석현까지 3대의 조화도 빛났다. 그리고 영화 개봉 이후 박보영은 여러 영화상에서 신인상을 싹쓸이했다. 박보영의 등장에 충무로도 들썩거렸다.

지금도 박보영은 차태현을 아빠라 부른다. 바쁜 스케줄에도 지난해 초 차태현이 출연 중인 KBS2 예능프로그램 ‘1박2일’ 여사친(여자사람친구) 특집에 한달음에 달려간 의리와 우정도 화제가 됐다.

홍성농고의 전설적인 일진 영숙에게 걸리면 국물도 없다. 영화 ‘피끓는 청춘’의 한 장면.
홍성농고의 전설적인 일진 영숙에게 걸리면 국물도 없다. 영화 ‘피끓는 청춘’의 한 장면.

‘피끓는 청춘’(2014)

도봉순의 불량 버전이 궁금하다면 이 영화를 보면 된다. 1982년 충남 홍성 일대를 평정한 ‘전설의 일진’으로 변신한 박보영의 색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홍성농고 ‘짱’ 영숙(박보영)은 체구는 작지만 특유의 깡다구와 카리스마로 패거리를 거느리고 다니는 무시무시한 여학생이다. 어릴 적부터 친구로 자란 홍성농고 카사노바 중길(이종석)을 좋아하지만 일진의 체면을 지키느라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다 중길이 서울에서 전학 온 소희(이세영)에게 관심을 보이자 더는 참지 못하고 감정이 폭발하고 만다.

구수한 충청도 말투로 험악한 사투리를 차지게 구사하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서슴지 않으며, 중길을 불러다 “나는 왜 안 꼬시는 거냐”며 시비를 거는 영숙은 ‘걸크러시’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중길에게 퇴짜 맞은 뒤 자신에게 집적거리는 중길의 단짝 황규(박정민)를 두들겨 패버리는 장면은 박보영의 투지와 박정민의 인내가 빚어낸,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다. 이렇게나 살벌한 영숙이 중길과 소희의 다정한 모습에 상심해 새우젓통을 열다 엉엉 울어버릴 때 관객들은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영화는 관객수 167만으로 크게 흥행하진 못했지만, 박보영 필모그래피에는 의미 있는 순간으로 남았다.

당시 박보영은 영숙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남자를 지켜주는 여자라는 흔치 않은 캐릭터라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박보영의 선택은 늘 그랬다. ‘과속스캔들’에서는 아들을 지켰고, ‘늑대소년’(2012)에서는 늑대인간 철수(송중기)를 지켰다. 보호 받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강해지기를 택하는 주체적인 여성상이 박보영에 의해 진화를 거듭한 결과물이 바로 도봉순이다.

‘돌연변이’는 한국 사회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서글프고도 유쾌한 우화다.
‘돌연변이’는 한국 사회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서글프고도 유쾌한 우화다.

‘돌연변이’(2015)

박보영은 또 한번 변신해 ‘키보드 워리어’가 됐다. 인터넷 ID는 ‘폭행몬스터’. 온라인상에서는 난폭한 언행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보통의 취업준비생. 박보영은 이 영화에서 동시대와 호흡하며 자신의 연기를 현실 속으로 한 걸음 더 가져갔다.

돌연변이’는 아르바이트로 제약회사 실험에 참여했다가 생선인간이 된 박구(이광수)라는 인물을 둘러싼 소동에 한국사회 현실을 재치 있게 버무려낸다. 박구는 청년세대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사회적 신드롬을 낳지만 한편에선 퇴출돼야 할 ‘종북 생선’이라는 공격도 받는다. 박구를 이용해 부와 명성을 쌓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온갖 수난을 겪던 박구는 결국 인간이 아닌 생선이기를 선택하면서 관객들 가슴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킨다.

이 영화에서 박보영은 생선인간이 돼 나타난 옛 남자친구 박구를 세상에 알린 주진을 연기한다. 제약회사에서 어렵게 탈출한 박구를 다시 제약회사에 팔아 넘겼지만 이후 논란의 중심에 선 박구를 진심으로 걱정하기도 한다. 초반부 주진의 비정하고 이기적인 모습은 박구의 어리숙하고 순진한 모습과 대비되면서 박구에 대한 감정 이입을 이끈다.

박보영은 기꺼이 조연의 자리에서 자신을 낮춰 생선인간 원톱 주인공을 빛낸다. 더 큰 배역과 흥행성 있는 작품을 마다하고, 총제작비 5억원 남짓한 저예산이면서 신인감독의 데뷔작인 ‘돌연변이’를 선택한 용기도 평가 받아 마땅하다. 박보영은 이광수에게 박구 역을 추천해 출연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영화에서 주진은 훗날 9급 공무원이 되는데 키보드 워리어로 활동한 경력을 직업에서도 활용하다 물의를 일으켜 뉴스에 나오게 된다.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에서 야당 후보에 악플을 달았던 여직원을 패러디한 설정이다.

박보영의 사랑스러운 유혹에 남자주인공뿐 아니라 시청자들도 홀딱 반했다.
박보영의 사랑스러운 유혹에 남자주인공뿐 아니라 시청자들도 홀딱 반했다.

‘오 나의 귀신님’(2015)

아역 시절 이후로는 줄곧 영화에 집중해 온 박보영이 처음으로 출연한 장편 드라마다. 박보영이 본격 멜로 연기를 펼친 것도, 키스 장면을 소화한 것도 이 드라마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박보영은 사실상 1인 2역을 소화했다. 주눅들어 있는 소심한 주방보조 나봉선일 때와 음탕한 처녀귀신 순애가 빙의했을 때 모습이 180도 달랐다. 한 얼굴로 서로 다른 두 인물을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소화해낸 박보영의 연기력이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봉선은 워낙 심약해 눈앞에 보이는 귀신에 두려워하며 벌벌 떨지만, 순애의 영혼이 몸에 들어오면 돌변했다. 연애 한번 못해보고 죽은 게 원통해 봉선의 몸에 들어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낼 남자를 찾는 순애는 저돌적이고 귀여웠다. 까칠한 셰프 강선우(조정석)를 덮치면서 “나랑 한 번만 하자”고 유혹하고 온갖 애교도 부린다.

박보영이 연기한 순애와 봉선은 우리 사회 여성의 숨겨진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여성 캐릭터였다. 박보영은 그렇게 자신의 연기 세계의 외연을 또 한번 넓혔다. 자신의 이미지를 억지로 부수지 않으면서 그 이미지를 벗어나는 현명한 행보가 돋보였다. 늘 기대 이상을 보여줬지만 박보영은 이 드라마를 통해 연기력과 흥행성을 모두 인정받으며 ‘믿고 보는 배우’로 거듭났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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