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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을 위해 사도 바울로 거슬러 가다

입력
2017.03.26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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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적 수도승의 삶에서 구원을 찾을 수 없었던 루터는 성경을 파고 들어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연구했다.
금욕적 수도승의 삶에서 구원을 찾을 수 없었던 루터는 성경을 파고 들어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연구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종교개혁. 근대의 중요한 시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 거대한 정신적 조류의 공통점은? ‘원천으로의 회귀’를 가장 중요한 공통점으로 꼽을 수 있지 않나 싶다. 르네상스는 고전시대의 ‘재생’ 또는 ‘부흥’을 의미한다. 인문주의가 내건 슬로건은 ‘원천으로’이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고대를 통하여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간 정신적 운동이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을 ‘갱생’이라고 표현했다. 갱생을 통한 개혁은 15~16세기의 시대정신이었다.

루터는 원래 중세적인 방식에 따라서 수도원에 들어가 경건하고 금욕적인 삶을 통해 구원을 추구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얻을 수 없었다. 그가 구원의 확신을 얻은 것은 오히려 성서의 연구를 통해서였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신학 교수가 된 루터는 먼저 구약을 강의했다. 1512년 10월 취임과 더불어 창세기를 강의했고 1513년 8월부터 시편 강의를 시작하여 1515년까지 계속했다. 이어서 신약으로 넘어갔다. 1515~16년에 로마서를, 1516~17년에 갈라디아서를, 1517~18년에 히브리서를 강의했다. 루터는 성서를 연구하고 강의하는 과정에서 교부신학, 스콜라 신학, 인문주의 등의 다양한 연구업적을 폭넓게 참고했다.

금욕적 수도 생활에서 구원의 확신을 못 얻다

루터가 중세적 신학에서 근대적 신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 길잡이가 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었다. 이미 성서신학 교수가 되기 전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연구한 루터는 시편 강의에서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기존과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루터로 하여금 바울의 신학을 심층적으로 연구하도록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루터가 1515년부터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히브리서를 강의한 것은 그 이전에 구약을 강의했기 때문에 구약과 신약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 아니라, 바울의 신학에 천착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히브리서는 바울의 서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루터가 중세적 신학에서 근대적 신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길잡이가 된 것은 바울의 신학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적 신학이 형성되는 데에는 특히 로마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에게 로마서는 신의 말씀인 성서를 전체적이고 압축적으로 조명해주는, 그러므로 가장 주되고 가장 순수한 복음이었다.

수도사로서의 루터가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신은 진노하고 심판하고 벌주는 존재라는 중세적 신학에 의해 지배되어서다. 그에게 신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당시에는 신의 ‘의’(義)란 곧 ‘심판자와 징벌자의 의’라는 공식이 성립했다. 신은 의롭지 못한 인간과 그의 행위를 심판하며 벌주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루터는 이러한 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 아니 신을 증오했으며 신의 의에 대해 분노했다. 그리고 온통 절망에 빠졌다. 중세적 신학의 패러다임에 입각해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신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에서 ‘신의 의’를 해석할 때 루터의 두려움과 공포 및 절망은 극에 달했다.

분노하는 신이 아니라 자비로운 신을 향해

그렇지만 바울이 설파한 것이 진정 무엇인가 알고자 하는 갈급한 마음에 밤낮없이 그 구절에 매달렸으며, 그 결과 신의 의가 복음 및 믿음과 갖는 연관성을 깨닫게 되었다. 자비로운 신은 인간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며 신의 의는 바로 복음을 통해 나타난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비로운 신의 은총에 의해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롭게 됨으로써 구원을 얻으며,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신의 의를 받아들인다.

이제 성서 전체가 루터에게 완전히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그것은 중세 신학과의 결별이었으며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였다. 루터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545년에 당시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다시 태어나서 천국으로 들어갔다.”

루터가 파고든 인물 사도 바울. 특히 로마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루터가 파고든 인물 사도 바울. 특히 로마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이 일대 사건을 신학에서는 “종교개혁적 돌파”, “종교개혁적 발견” 또는 “종교개혁적 인식”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일어난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중요한 것은 그 돌파가 종교개혁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을 불도저처럼 단숨에 밀어붙인 결과가 아니라 수년간에 걸쳐 성서를 연구하는 과정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루터는 기독교 신학의 원천인 고대로 돌아감으로써 중세적 신학을 극복하고 근대적 신학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그에 기반하여 중세 스콜라 신학의 집대성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루터가 보기에 아퀴나스는 성서나 계시에 근거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근거하며, 따라서 그의 신학은 신학이 아니라 단순한 의견에 불과하다. 또한 이러한 의견 위에 구축된 중세의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이교도의 교회일 뿐이다.

중세의 기반,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다

더 나아가 루터는 아퀴나스 신학의 철학적 기반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이교도라고 비판하면서 그의 철학을 대학으로부터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세 대학의 기초철학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철저히 부정한다는 것은 중세 대학의 정신적 토대를 완전히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철학 위에 구축된 스콜라 신학의 존립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결국 중세적 신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면서 신학의 문법을 새로이 쓰는 것, 즉 신의 입술에서 새로운 신학의 문법을 읽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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