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경제 최지윤] 한석규는 의식적으로 '배우'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대신 연기자 혹은 액터(Actor)라 했다. "신분, 계급적인 시선에서 만들어진 단어 같아서"다. 한석규의 표현에 따르면 배우는 '사람이 아닌 짓거리를 뛰어나게 하는 사람'이다. 배우는 배우 배(俳), 뛰어날 우(優)를 쓰는데, 배는 다시 사람 인(人)과 아닐 비(非)로 나뉘기 때문.
그런데 '배우가 하는 일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더란다. 한창 고민 하던 시기 선택한 작품이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였다. "의사의 직업관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23번째 영화 '프리즌'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몇몇 작품에서 악역을 선보였지만 '프리즌'의 익호처럼 극악무도한 캐릭터는 처음. 배신하면 숟가락을 거꾸로 들어 눈을 사정없이 후벼 팔 만큼 잔인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인간과 권력을 얘기해보고 싶었다. 지배와 피지배 그리고 권력의 관계. 인간 문명사가 존재하는 한 해결이 될까? 너무 거창한데 내가 답을 못 내겠더라. '프리즌'을 통해 답을 찾고 싶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한석규가 공개적으로 인터뷰에 나선 건 의례적이었다. 그 동안 인터뷰를 잘 하지 않은 것도 연기자로서 철학과 관련 있어 보였다. "마음 같아선 (인터뷰를) 안 하고 싶다. 연기자는 말로 하는 직업이 아니다. 우리는 몸, 연기 즉 결과물로 말해야 한다. 인터뷰를 하면 미사어구만 늘어놓게 된다. 아마 오늘도 집에 가서 '으이구~ 이놈아' 자책할 것 같다(웃음)."
23일 개봉한 '프리즌'은 감옥의 절대 제왕 익호(한석규)와 새로 수감된 전직 꼴통 경찰 유건(김래원)의 범죄 액션을 그렸다. 익호가 생각하는 교도소는 일반적인 개념과 사뭇 다르다. 밤이 되면 죄수들이 밖으로 나가 대한민국 완전범죄를 만든다. 세상을 움직이는 놈들이 바로 교도소 안 죄수들이다. 한석규는 "익호의 목표는 출소가 아니라 교도소 안에 있는 거다. 모든 죄수자들의 목표는 형을 낮춰서 나가는 것 아니냐. 익호는 교도소를 나갈 필요가 없다. 안에서 밖을 다 컨트롤 할 수 있다. 익호가 그렇게 된 이유는 나현 감독이 말하고 싶은 주제"라고 설명했다. 이어 "유건이 익호가 될 수도 있다. 유건이 죽으면 또 다른 인물이 익호가 되는 것"이라며 "'익호'라는 인물은 계속 나올 거다. 그래서 나 감독이 소제목으로 '영원한 제국'을 넣었는데 아쉽게도 빠졌다"고 웃었다.
'프리즌'은 교도소를 주 배경으로 했다. 세트장이 아닌 전남 장흥교도소에 촬영해 완성도를 높였다. 한석규 역시 "실제 교도소에서 촬영할 수 있었던 건 큰 복이다. 장흥군의 명소가 되지 않겠냐"고 내심 기대했다. "처음 감옥에 들어가 봤다. 죄수들이 쓰던 물건도 있고 엽서도 나뒹굴더라. 벽에 낙서도 그대로였다. 영화에서 보면 우리가 교도소에서 난장을 피우지 않냐. 나중엔 불도 질렀는데 실제 상황처럼 대단했다. 세트장에서 촬영했다면 가당키나 했겠냐? 장흥 군수가 와서 '아깝다!'고 하더라. 감옥 체험관으로 쓴다는데 참 잘된 일이다."
한석규와의 인터뷰는 다른 배우들과 확연히 달랐다. 영화를 홍보하거나 본인을 한껏 꾸며서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1%도 없어 보였다. 오죽하면 홍보사 관계자가 "영화 얘기 좀 해 달라" 했을까. 영화 관련 질문을 해도 결국 본인의 인생관으로 이어졌다. 23편의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심은하와 함께 찍은 '8월의 크리스마스'라며 추억에 젖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작품을 또 하고 싶냐'고 묻자 바로 "난 욕심이 많다. 나이 먹기를 기다렸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프리즌'은 독, 고통 같은 얘기다. 창작자들은 보통 두 분야로 나누어 얘기한다. 난 가능하면 사랑, 희망 등 밝은 쪽으로 얘기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좋더라. 물론 다 그렇게 만들면 안 되겠지만"이라고 너털웃음을 보였다.
이창동 감독이 "한석규 연기의 바탕은 과거 지향성"이라고 한데 대해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석규도 맞장구 치며 "'초록 물고기' 할 때 이창동 감독이 과거에의 향수로 연기를 한다고 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난 미래에 관심이 없다. 연기자는 현재가 중요하다. 지금의 일을 하는 게 연기라서 미래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는 상상력으로 과거를 구현해서 지금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동의했다.
한석규는 1990년대 한국영화 산업의 중심이었다. 대표작인 '은행나무 침대' '초록 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등도 이쯤 나왔다. 한석규는 1990년대와 2000년대는 크게 다르지 않다면서 "사는 건 다 똑같다. 연기자라는 직업인으로서 다시 한 번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과거에는 개인으로서 뭔가 이루는 것에 집중했다. 지금은 해낸다기보다 계속 하는 게 중요하다"고 짚었다.
하지만 아직도 본인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털어놨다. "다들 그렇지 않냐"며 "연기자는 인연이 맞는 작품을 만났을 때 자기도 그렇게 할 줄 몰랐는데 확 하는 경우가 있다. 무아지경은 아니다.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는데 매 순간순간 의식하면서 하지 않는 거다. 그런데 난 몰입이란 걸 평생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석규가 25년 넘게 연기하면서 관객들과 통한 뭔가가 궁금해졌다. '연기자 한석규는 뭐가 먹히는 것 같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애티튜드다. 25년간 익숙해진 게 아닐까. 관객들이'니가 왜 연기하는지 조금 알겠다'고 봐주는 것 같다. 이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연기자와 관객 둘과의 관계만 놓고 봤을 땐 좀 몰라야 한다. 너무 속속들이 알면 보는 맛이 없지 않냐. 그래서 인터뷰를 안 하나(웃음)." 사진=쇼박스 제공
최지윤 기자 plain@spor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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