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등교, 첫 학기, 첫 직장, 첫 연애. 내게 처음은 설렘보다 낯설고 서툰 그 무엇이었다.
일터를 옮겼을 때, 나는 2주 동안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받은 적이 있다. 어디에 사는지, 누구와 사는지, 고향은 어딘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학교, 학번 등등 소위 호구조사가 이어졌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 거주지와 가족과 동거여부와 학번을 드러내는 일은 불쾌한 일이다. 앞으로 같이 일할 동료라고 할지라도, 서로 잘 모르는 타인이기에 조심스럽다. 나의 가족 내력이 직무 능력과 관계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첫 인사를 호구조사로 착각한다. 그런데 직장에서만 이런 경험을 하는 걸까?
사람들은 처음 본 이에게 직업(혹은 소속), 출신지, 출신학교, 가족에 대해 묻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상대방의 배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개인을 파악하는 방식은 일, 학교, 가족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다. 직업이 없고, 부모가 없고, 고향이 없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은 무척 곤욕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처음 선 자리에서 타인을 고려하지 않은 질문은 반복된다. 그 까닭은 한국사회의 인사 언어가 빈곤한 탓이거나, 늘 그런 방식으로 관계 맺기를 해온 관습 때문이다.
새로운 곳에 들어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공간은 빨리 적응해야 할 낯선 곳이지만, 사람을 맞이하는 입장에서는 익숙한 자리에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맞이하는 사람들은 익숙함을 깨는 낯선 존재를 잘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라도 빨리 공통점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첫 만남에서 무례하게 학연, 지연, 가족을 묻는 것은 빠른 동질감을 찾으려는 행동이자, 타인의 낯섦은 자신과 익숙한 존재가 되기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뭇 남성들이 군대 이야기와 나이로 금방 서열과 친분을 쌓는 것처럼, 사람들은 낯섦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우리는 불편한 질문에 모두 답할 의무가 없음에도 보이지 않는 위계 때문에 그 불편함을 감수하려고 한다. 익숙함과 낯섦의 위계, 고용주와 노동자의 위계, 선배와 후배의 위계, 남성과 여성의 위계, 서울과 비서울의 위계 등. 이러한 위계는 서열관계를 더 견고하게 만드는 위계가 되기도 하고, 때로 이 관문이나 시험을 잘 통과해서 그 공간에 남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협상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된다.
훌쩍 봄이 왔고, 새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공채준비를 한다. 여기저기 새롭게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나날이다. 그런데 생기로움을 느끼기도 전에 죽음의 소식이 들려온다. 경기도에서 고등학생 네 명이 자살을 했고, 그보다 앞서 콜센터에서 실습하던 고등학생은 콜 수를 채우지 못해 자살을 했다. 무언가 시작해보기도 전에, 새로운 공간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한국사회는 새로 온 사람들에게 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나 호의적이었나. 나이가 어릴수록, 경력이 낮을수록, 여성일수록, 학력이 낮을수록 더 잦은 이동을 경험하고 폭력적인 노동환경을 강요 받는다. 마치 딸 같아서, 귀여워서, 친해지고 싶어서라는 말로 폭력은 일상이 되고 친절로 둔갑한다.
누구나 처음은 서툴 수 있지만, 처음이 아닌 사람들이 나중에 온 이 사람들을 맞이하는 방식은 서툴러서는 안 된다. ‘알아서 적응해라’는 무책임한 말은 통과의례의 긴장과 폭력을 견디라는 말과 같다. 처음 온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천천히 알아가는 데 우리는 낯섦을 조금 더 견딜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다리는 과정에서 처음 온 사람이 천천히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와 방법을 찾고 먼저 꺼낼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누구라도 처음에 선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천주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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